[시론] 自尊보다 生存이 먼저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입력 2019.07.17 03:14

美 프로야구, 영국서 정규경기… '야구 종주국' 자리도 英에 넘겨
국가는 이념과 명분보다는 실용과 실리 앞세워야 생존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지난달 하순 나는 영국에서 처음 열린 미국 프로야구 경기를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또한 나를 초청한 메이저리그(MLB) 커미셔너 로브 맨프레드와 만나, 오는 11월 프리미어12 세계야구대회와 내년 도쿄올림픽에 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 메이저리거들의 출전 허용 등 현안도 협의했다.

천문학적 돈을 아끼지 않고 흙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잔디는 프랑스에서 가져와 축구장을 임시 야구장으로 개조한 과감한 글로벌 아웃소싱도 놀라웠지만, 야구 불모지에서 6만석 관람권이 이틀간 매진된 것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런던 시리즈'를 홍보하는 MLB 홈페이지였다. "야구가 고향 영국으로 돌아간다." 야구의 기원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라는 중대 선언이었다. 이것은 1907년 공식 조사단의 4년 연구를 통해 "야구는 1839년 봄 뉴욕의 쿠퍼스타운에서 에브너 더블디가 창안했다"고 규정한 미국 정부 발표를 뒤엎는 반전이자, 유럽에서 처음 치른 메이저리그 경기를 성공으로 이끈 흥행 무기이기도 했다.

수년간 관람객이 줄어들고 노령화하자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MLB가 유럽이라는 신흥 야구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종주국 자리까지 양보하는 혁명적 발상 전환을 보며, 내 뇌리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일련의 국제 관계, 특히 한일 관계와 우리 정부의 대처 방식이 떠올랐다. 4강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이야말로 자존(自尊)보다 생존(生存)을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로 치우친 시계추를 현재와 미래로 재설정하고, 이념과 명분보다 실용과 실리를 앞세워야 생존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

대한(對韓) 수출 규제를 밀어붙이는 아베 총리의 속셈을 놓고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유와 목표가 무엇이든, 조기에 수습하지 않으면 일본의 수출 규제가 전방위로 확산할 우려도 있다. 우리 경제가 전반적 타격을 입는다면 IMF 개입을 초래했던 외환 위기가 다시 도래할 수도 있다는 각오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비상 계획)이 필요하다.

한일 관계는 과거와 현재, 실리와 명분, 이성과 감정이 두루 얽힌 데다 대응과 맞대응이 선순환과 악순환을 반복하여 대한해협만큼이나 애증의 골이 깊다. 경제 분야에서 두 나라는 바늘과 실 관계다. 유감스럽게도, 바늘 역할을 하는 일본은 우리 급소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우리 기업은 전체 연구개발(R&D) 투자는 적지 않다. 그러나 응용 기술이나 신제품 개발(D)에 치우쳐 첨단 과학과 원천 기술에 대한 연구(R)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소재 산업에 약하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공격한 우리의 아킬레스건이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정부가 핵심 원천 기술 연구 지원을 대폭 강화하고 산학연이 연구 역량을 극대화한다면, 길게 볼 때 2019년은 한국 경제가 퀀텀 점프하는 원년이 될 수도 있다.

당장은 무엇을 해야 하나? 이념에 경도되면 외눈박이가 된다. 당파에 매몰되면 맹목이 될 수밖에 없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5000만 국민이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결기로 똘똘 뭉치고, 여와 야를 떠나 국회는 정쟁을 중단하고 일본을 향해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부가 먼저 이념의 우상에서 벗어나 국민을 설득하고 통합하는 데 앞장서야 할 때다. 과거라는 동굴에서 나와 대통령이 직접 아베와 담판을 벌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한일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때다. 스푸트니크 쇼크를 역으로 활용하여 우주 경쟁의 승자가 되고 '팍스 아메리카나'를 건설한 미국의 실용주의 리더십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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