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의 윔블던 러브] 모두 황제를 응원했지만… 하늘은 '황제 사냥꾼'을 선택했다

윔블던=양지혜 기자
입력 2019.07.16 03:00 수정 2019.07.16 05:03

보안요원·식당요리사·청소부 등 영국 사람들은 "마지막 기회… 하느님, 제발 로저를 도와주세요"

14일 일요일(현지 시각) 영국에선 세 가지 주요 경기가 열렸다. 잉글랜드와 뉴질랜드가 격돌한 크리켓 월드컵 결승전, 영국의 F1 스타 루이스 해밀턴(34)이 출전한 그랑프리, 그리고 로저 페더러(38)와 노바크 조코비치(32)가 맞붙은 133회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

페더러는 스위스 남자다. 영국 사람들은 자기네 안방 윔블던에서 8번이나 우승한 스위스인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출입구 보안 요원부터 식당 요리사, 기념품 가게 직원, 화장실 청소부까지 모두가 페더러를 응원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 아닐까요. 하느님, 제발 로저를 도와주세요." 미디어 센터 직원은 기자들 손목에 결승전 취재 팔찌를 끼워주면서 페더러를 위해 기도했다.

결승전이 열린 오후 2시 센터코트를 채운 관중 1만5000명도 대부분 페더러 편이었다. 페더러는 천사였고 조코비치는 악마였다. 로열 박스 맨 앞줄에 앉은 윌리엄 왕세손 부부도 페더러를 향해 더 힘차게 박수를 쳤다. 페더러가 베이스라인에서 한 손 백핸드 슬라이스를 날릴 때, 공은 나비 날갯짓처럼 네트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관중은 묵직하고 낮게 깔리는 페더러의 궤적을 보면서 나지막이 "신이시여(Oh my god)"를 연발했다. 테니스 코트를 2차원 평면으로 욱여넣는 중계 카메라는 페더러의 공 높이가 연출하는 아찔함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15일(한국 시각) 윔블던 테니스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우승을 거머쥔 노바크 조코비치가 쪼그리고 앉아 물끄러미 관중을 바라보는 모습.이미지 크게보기
"내가 테니스의 왕" - 15일(한국 시각) 윔블던 테니스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우승을 거머쥔 노바크 조코비치가 쪼그리고 앉아 물끄러미 관중을 바라보는 모습. 이날 센터코트를 찾은 대부분 팬이 로저 페더러를 응원한 가운데 조코비치는 "관중이 외치는 '로저'를 '노바크'로 생각하며 경기했다"고 말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하지만 조코비치가 3대2(7-6〈5〉 1-6 7-6〈4〉 4-6 13-12〈3〉)로 이겼다. 1990년대 말 코소보 전쟁 때 나토군의 공습 사이렌을 들으며 물 뺀 수영장에서 테니스를 친 세르비아 남자에게 만원 관중의 야유나 저주 따위는 별것 아니었다. 초읽기에 돌입하면 더 대범해지는 이창호 9단처럼, 위기가 오면 더 세졌다.

조코비치가 5세트 7―8 상황에서 맞이한 16번째 게임. 페더러는 직전 조코비치의 서브 게임을 땄고, 매치포인트(40―15)까지 갔다. 우승까지 딱 한 걸음. 황제가 포효하는 걸 찍으려고 만원 관중이 기립해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조코비치가 내리 네 포인트를 따 다시 8―8. 결국 12―12 동점이 됐고 올해부터 새로 적용된 타이브레이크(7점 먼저 내기)에서 조코비치가 이겼다.

보이지 않는 손발이 있는 것처럼 모든 공을 받아내는 상대에게 질려 버린 페더러는 마지막 공을 하늘로 날려버렸다. 경기 시간 4시간 57분. 마지막 5세트만 122분을 했다. 땀을 잘 안 흘리는 페더러가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었다. '마라톤 테니스'를 없애려고 규칙을 바꿨는데도 2008년 페더러와 라파엘 나달(33·스페인)의 결승전(4시간 48분)보다 9분이 더 길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꽃밭 속 잡초처럼 숨어있던 세르비아 팬들은 그제야 "노바크가 테니스 왕이다"를 외치며 돌아다녔다.

윔블던 잔디 뜯어 먹는 조코비치… 페더러 "지금은 힘들지만 계속 앞으로 나갈 것" - 윔블던 두 남자의 명암이 엇갈린 모습. 노바크 조코비치(왼쪽)가 윔블던 잔디를 뜯어 먹는 우승 세리머니를 펼친 가운데 로저 페더러는 패배의 충격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AFP연합뉴스, 로이터연합뉴스
기자회견에 나타난 조코비치는 이겼어도 차분했다. 그는 "관중들이 '로저'를 외치면 '노바크'로 생각하고 경기했다"면서 "육체적으로는 2012년 나달과 벌인 호주오픈 결승전(당시 5시간 53분을 했다)이 가장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오늘 경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겹쌍둥이 아빠인 페더러에게 패배는 여전히 아팠다. 그는 "지금은 힘들지만 우울해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갈 것"이라고 했다. 11년 전 결승전과 비교해달라는 질문엔 "내가 두 번 다 졌다는 게 유일한 공통점"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조코비치는 윔블던 통산 5회 우승(2011·2014·2015·2018·2019)을 달성했다. 1948년 로버트 팔켄버그(미국)처럼 상대에게 매치포인트를 내줬다가 우승컵을 차지했다. 그랜드슬램 우승 횟수는 페더러(20회), 나달(18회)을 잇는 3위(16회).

이날 영국인들은 윔블던 빼고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잉글랜드 크리켓 대표팀은 뉴질랜드를 꺾고(규칙을 모르지만 아무튼 이겼다) 사상 첫 월드컵 정상에 올랐고, 해밀턴도 그랑프리 시즌 7승에 성공했다. 그래도 허전하다. 센터코트 앞 레스토랑 직원 메건(22)은 의자를 걷어내면서 "페더러가 내년 윔블던에도 올까요"라고 걱정했다.

보름간 대회를 치르면서 18개 코트 잔디가 흙바닥이 보이도록 해졌고, 공원 텐트촌은 이제 자취를 감췄다. 윔블던은 새 잔디를 심고 2020년 7월을 기다린다. 내일 경기는 없다.


[올해부터 새로 적용된 5세트 타이브레이크란?]

윔블던은 올해부터 5세트 타이브레이크 제도를 도입했다. 경기 시간을 줄이고 선수들의 체력 고갈을 막기 위해서다. 기존에는 무조건 5세트에서 2게임 이상 앞선 선수가 나와야 경기가 끝났다. 반면 새 규칙에선 5세트 게임 스코어가 12―12가 되면 타이브레이크를 적용해 7포인트를 먼저 따는 선수가 이긴다. 이번 결승에선 노바크 조코비치가 7―3으로 포인트를 먼저 채우면서 첫 타이브레이크 윔블던 우승자가 됐다. 로저 페더러는 전체 포인트 숫자에서 218―204로 앞섰고, 서브 에이스도 26―10으로 압도했지만 막판 고비에서 무너졌다.



조선일보 A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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