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현실을 알고 큰소리쳤으면…

김태근 경제부 차장
입력 2019.07.16 03:15

은행들 보복 징후에 반년 대비… 자금줄 다변화 등 노심초사
금융계 "日 자금 빠지면 타격 커"… 당국 '큰소리'에 기업들 냉가슴

김태근 경제부 차장
국내 5대 금융지주가 일본의 경제 보복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운 것은 올해 초부터였다. 일본 현지 지점과 거래 기업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얘기가 심상치 않았다. 한 금융지주사 고위 임원은 "일본 정부가 사전 경고용으로 이런저런 제재 가능성을 계속 흘렸다"며 "자금을 가져다 쓰는 처지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3~4월쯤 금융지주마다 일본의 가능한 제재 시나리오를 만들어 사전 대비를 시작했다. A금융지주는 일본이 내놓을 수 있는 제재를 크게 4가지로 분류했다. 첫째가 핵심 산업용 원료와 기술의 반출 제한, 둘째가 한·일 은행 간 크레디트라인(신용공여) 차단, 셋째가 일본이 보유한 한국 기업 주식(약 12조원)에 대한 의결권 행사, 마지막이 일본이 계획했던 국내 투자 계획 철회였다. 반도체 원료에 대한 반출 제한은 현실이 됐다. 남은 3가지는 모두 돈의 흐름, 금융(金融)에 대한 것이다. A지주는 이미 자금 조달처를 미국과 유럽으로 다변화했고 일본 은행들과 수시로 접촉해 빌린 자금의 만기 연장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다른 금융지주들 사정도 비슷하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지난 5일 "일본 자금이 국내에서 빠져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는 민(民)의 기민한 대처를 이미 보고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국내에 들어온 일본 자금도 많지 않다. 일본 은행들이 국내에 빌려준 돈은 전체 대출의 1%를 갓 넘고(18조원), 주식(12조원)과 채권(10조원) 투자는 각각 시장의 1%에도 못 미친다. 지난달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 채권 투자는 사상 최대 규모(124조원)를 경신했고, 주식시장에도 외국 돈이 들어왔다. '일본이 아니라도 돈 빌릴 곳은 많다'는 생각이 들 법하다.

하지만 금융계에선 "장관이 가볍고 경솔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일본을 잘 알수록,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금융 당국에 실망하는 정도가 컸다. 최 위원장에게 직접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위치의 금융계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4년 전 끊어진 한·일 통화 스와프를 복원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일본은 최근까지 '아소 부총리(재무상)가 마음을 돌려야 한다'며 거부했다. 경제 보복 이후에는 아예 '아베의 마음을 바꿔보라'고 나온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일본이 자금을 끊으면 다른 나라의 투자 심리에 악영향을 준다"고 했다.

다른 B시중은행장은 엔화 조달이 막히면 달러나 유로 등 다른 통화의 조달 금리가 치솟을 것이라 걱정했다. 그는 "엔화는 은행들의 외화 조달에서 늘 일정한 비중을 차지한다. 갑자기 그 돈을 달러로 바꾸려면 이자를 더 내야 하고, 자금 관리도 불안해진다"고 했다. 대기업들이 해외 투자를 위해 일본 은행에서 빌린 돈을 걱정하는 이도 있다. C은행의 고위 임원은 "최근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일본 은행들을 만나 해외 공장에 제공한 대출 조건에 변동이 없는지 챙긴 것으로 안다"며 "우리와 일본의 돈거래는 직접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다"고 했다. 상반기 일본의 국내 투자는 5억4000만달러(38.5%) 줄었다. 작년 9월 말과 올해 3월 말을 비교하면 일본 자금의 국내 대출은 2조8000억원 줄었다. 이미 현해탄을 마주한 한·일(韓日) 간 돈 줄기가 가늘어지고 있다.

금융계뿐이 아니다. 요즘 기업들은 "정부가 속 모르는 큰소리로 상황을 악화시키지 말라"고 한다. 문재인 정부는 자초(自招)한 일본과의 갈등을 푸는 데 실력을 집중해야 한다. 듣기 좋은 큰소리는 언제든 할 수 있다.


조선일보 A31면
헬스조선 상례서비스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