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美 '韓·日 중재' 안 하겠다면 우리에게 다른 지렛대 있나

입력 2019.07.16 03:20
정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와 관련해 '미국의 중재'를 끌어내기 위해 외교 총력전에 나섰다. 지난 1주일 새 김현종 안보실 2차장을 비롯해 외교부 경제외교조정관, 양자경제외교국장이 줄줄이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측 관료들을 만났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아프리카 순방 도중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통화를 했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도 곧 미국을 찾는다고 한다.

미측의 반응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해리스 주한 대사는 "지금은 미국 정부가 한·일 관계를 중재하거나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했고, 한·일을 방문하는 스틸웰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내가 중재할 예정은 없다"고 했다. 미측에서 "한·일 갈등이 매우 우려스럽다" "한·미·일 공조가 중요하다"는 말도 나왔지만 원론적 언급에 가깝다. 출국 때 "그 이슈(미국의 중재)도 당연히 논의할 것"이라고 했던 김현종 차장이 귀국길에는 "미 행정부나 의회에 중재를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을 바꾼 것은 미국의 분위기가 우리가 바라던 것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일 간 대립이 해결된 것은 대부분 미국의 물밑 움직임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한·일 과거사 문제에 개입을 꺼리지만 양국 갈등이 한·미·일 안보 협력이라는 핵심 안보 이익을 저해할 정도가 되면 중재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전 정부 당시 한·일 위안부 합의 때도 미국이 물밑에서 움직였다. 한·일 간 대화 채널이 단절된 지금 미국 카드는 발등의 불을 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우려스러운 점은 미국이 지금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는 게 일본이 무역 보복 조치를 취하기 전 미국에 사전 협조 요청을 하고 양해를 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다. 아베 총리가 3개월 연속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수 있다. 우리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8개월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사이 일본은 치밀하게 움직였다면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 예단하기 어렵다. 일본은 미국이 공들이는 인도·태평양 구상, 반(反)화웨이 전선 동참 요구에 적극적이지만 한국은 미온적이다. 아쉬울 때만 '미국이 나서 달라'고 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지 걱정이다.

만에 하나 미국이 나서지 않겠다면 우리에게 남은 지렛대는 뭔가. 일본은 다음 달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공식화했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청와대 회의에서 "우리 기업들이 수입처 다변화, 국산화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결국에는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임을 경고한다"고 했다. 이런 말로는 반도체 생산 차질을 막을 수 없다.


조선일보 A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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