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의 윔블던 러브] 거인 꺾은 할레프… '루마니아판 박세리' 신화 썼다

윔블던=양지혜 기자
입력 2019.07.15 03:00 수정 2019.07.15 04:55

파워 넘치는 윌리엄스 상대… 예상 깨고 56분만에 2대0 완승
英에 이주해 일용직 전전하며 눈칫밥 먹는 루마니아인들에겐 윔블던 우승은 특별한 의미

라즈반 프레펠리타씨는 루마니아 온라인 매체 '레푸블리카' 편집장이다. 컴퓨터 수리를 부업으로 해가며 모은 돈으로 윔블던 취재를 왔다. 시모나 할레프(28·세계 7위)와 세리나 윌리엄스(38·10위·미국)가 맞붙은 윔블던 여자 단식 결승전이 13일(현지 시각) 오후 2시 센터코트에서 시작할 때 그는 눈을 감고 여러 번 성호를 그었다.

"시모나가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루마니아는 가난해서 잔디 골프장도 별로 없는데, 세계 최고 테니스 대회 윔블던에서 우승을 꿈꾼다니요. 시모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 체조 전설)보다도 훨씬 대단해요."

할레프가 윌리엄스를 이겼다. 56분 만에 2대0(6-2 6-2) 완파. 윌리엄스가 이길 줄 알고 '엄마 세리나가 통산 24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을 했다'고 미리 기사 써놨던 기자들은 부랴부랴 노트북을 다시 켰다. 키 168㎝ 할레프는 그동안 윌리엄스와 10번 대결에서 한 번 이겨봤을 정도로 약했다. 하지만 이날은 빠른 발로 윌리엄스의 힘을 눌렀다. 윌리엄스는 공을 아무리 세게 쳐도 할레프가 끝까지 쫓아가 더 깊숙한 각도와 방향으로 역공을 펼치자 범실 26개를 남발하고 졌다.

할레프는 여유가 있었다. 시상식장에선 "올잉글랜드 클럽 회원(윔블던 우승자는 AELTC 회원이 된다)이 되는 소원을 드디어 이뤘다"고 만원 관중을 한바탕 웃기더니 "엄마가 '윔블던 결승은 꼭 가보자'고 했는데 그 소원도 이뤄 드렸다"고 말해 가족석에서 지켜보던 엄마를 울렸다. 그는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모든 공을 100% 공격적으로 쳐야 세리나를 이긴다. 어제는 리턴 연습만 30분 이상 하면서 대비를 많이 했다"며 "우승을 알았을 때 다리가 스르륵 풀리더니 내 안에 무언가가 빛처럼 차올랐다. 인생 최고의 테니스를 했다"고 기뻐했다. 패자 윌리엄스도 "오늘은 시모나가 믿기 어려울 만큼 잘했다. 나도 내 목표를 향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축하했다.

승자는 위풍당당했고, 패자는 품격 있었다. 13일(현지 시각) 윔블던 테니스 여자 단식 결승전이 시모나 할레프(왼쪽)의 승리로 끝나자 세리나 윌리엄스가 다가와 축하해주는 모습. 할레프는 “인생 최고 경기였다”고 말했고, 윌리엄스는 “시모나가 정말 잘했다”고 했다. /EPA 연합뉴스

할레프가 세숫대야만 한 은쟁반 트로피를 번쩍 들자 프레펠리타씨는 성호 긋던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시모나가 저와 고향이 같아요. 콘스탄차(Constanta)라고 흑해 연안인데, 정치나 경제나 뭐 되는 게 없습니다. 그래도 콘스탄차 사람은 포기하지 않아요. 시모나를 보세요. 작년 프랑스 오픈에서 그랜드슬램 대회 결승 네 번째 도전 만에 첫 우승을 하더니, 이번엔 윔블던에서 두 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을 하잖아요." 21년 전 박세리의 '하얀 맨발 샷'을 보고 살아갈 용기를 얻었던 한국인의 얼굴이 그에게서 보였다.

루마니아 팬은 많지 않았다. 센터코트 주변을 몇 바퀴 돌고 나서야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왔다는 카르멘(35)씨를 만났다. 왼손엔 루마니아 국기를, 목엔 '채권(Debenture) 티켓' 출입증을 맸다. 그는 "윔블던 채권자들이 파는 암표를 샀다. 그저께 준결승은 1000파운드(약 150만원) 줬고, 결승 티켓은 차마 말 못 할 큰 금액을 주고 샀다"면서 "몇 달치 생활비를 다 털었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루마니아 팬들이 윔블던에서 잘 안 보이는 이유도 설명해줬다. "영국에 루마니아 사람이 얼마나 많이 사는지 알아요? 다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라 직접 응원을 못 올 뿐이죠. 그래도 TV 중계를 보며 많이들 울었을 거예요." 뉴스를 찾아보니 영국엔 루마니아인이 약 40만명 있다. 폴란드(약 100만명)에 이어 둘째로 많은 인구로, 런던 북부 교외(번트 오크)에 주로 산다. 영국이 EU를 탈퇴하는 브렉시트를 추진하면서 EU 회원국 자격으로 건너온 이들도 입지가 불안해졌다. 영국 눈칫밥 먹으며 살던 루마니아 사람들에게 할레프는 긍지와 희망을 선물했다. 그것도 영국인의 자존심 윔블던에서.

이날 결승전 서브 순서를 정하는 동전 던지기는 열세 살 마르니 존슨이 맡았다. 윔블던 바로 옆동네(로햄튼) 사는 가난한 집 소녀로, 자선단체 '리제너레이트'를 알리려고 나왔다. 흑백이 반씩 섞인 피부의 소녀는 곱슬머리를 야무지게 올려 묶고 할레프와 윌리엄스 사이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루마니아의 쇠락한 항구에서 테니스를 배운 할레프와 미국 캘리포니아 빈민촌에서 자란 윌리엄스가 윔블던 우승을 다투는 장면은 존슨에게도 꿈을 선물했다. 무엇이든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꿈을.


조선일보 A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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