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33] 서로의 적진서 승리한 두 장군… 국가의 단합 여부가 운명 갈랐다

이탈리카·크로토네=송동훈 문명탐험가
입력 2019.07.11 03:00

스키피오가 건설한 이탈리카, 한니발이 물러난 크로토네

로마는 지중해 세계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 문명과 역사의 기록을 확인하는 것은 쉽다. 유럽 각국을 여행하다 보면 수시로 로마의 유산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피해가는 것이 오히려 지극히 어렵다. 그 유산과 마주할 때마다 '참 대단하다'란 생각이 든다. 멀리로는 2500년 전부터 가깝게는 1500년 전의 흔적 아닌가? 이렇게 로마를 건설하고 제국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다양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스토리가 '한니발 전쟁'이라 불리는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년~기원전 201년)이다. 로마는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단숨에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로 떠오를 수 있게 됐다. 그 과정에서 로마는 여러 번 생사의 기로에 섰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이번 회에서는 이베리아반도의 서남쪽 끝머리의 이탈리카와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크로토네를 찾아간다. 이제는 폐허로 남은 두 땅에서 한니발 전쟁을 이끌었던 두 남자를 떠올린다.

스키피오, 도시를 짓다

이탈리카(Itálica)는 고대 로마의 도시다. 오늘날 스페인 남부의 중심 도시인 세비야(Sevilla) 바로 옆에 있다. 폐허라 부르기엔 많이 남아 있지만 만족스럽지도 않다. 역사적 상상력과 공감대가 부족한 사람에겐 실망스러울 수 있다. 반대의 사람은 감개무량할 것이다. 2만5000명을 수용했다는 원형경기장에서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을 간직하고 있는 개인 빌라에 이르기까지 고대 로마 제국의 도시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췄다. 무엇보다 이탈리카는 로마가 이베리아반도에 건설한 첫 도시다. 스키피오의 군단병들이 세웠다(기원전 206년). 훗날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오현제(五賢帝) 중 트라야누스(Trajanus·재위 98~117년)와 하드리아누스(Hadrianus·재위 117~138년) 두 명이 이곳 출신이다. 결국 이탈리카는 업적과 명성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3명의 로마인과 직접 관련된 도시인 셈이다. 그러나 2차 포에니 전쟁 당시까지 이베리아반도는 한니발 가문의 근거지였다. 특히 이탈리카가 세워진 곳은 페니키아의 오랜 전략적 요충지인 카디스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스키피오는 어떻게 이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와 로마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을까?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근거지인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후 이탈리카를 세웠다(위 사진).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로마 정복에 실패한 후 크로토네를 통해 돌아갔다(아래 사진).이미지 크게보기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근거지인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후 이탈리카를 세웠다(위 사진).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로마 정복에 실패한 후 크로토네를 통해 돌아갔다(아래 사진). 오늘날 두 도시는 유적으로 남아 2200년 전 고대 지중해판 세계대전의 결정적인 순간을 증언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스키피오, 한니발의 심장을 겨누다

스키피오의 이름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기원전 236~183)다. 로마의 명문(名門)에 속한다. 같은 이름의 아버지 푸블리우스와 삼촌 그나이우스(Gnaeus)는 출중한 군인으로, 한니발 전쟁에서 이베리아 전선을 담당했다. 아버지와 삼촌이 전사한 후, 스키피오는 민회에서 이베리아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선출됐다. 27세의 젊은 나이였다. 비상시국이었기에 가능했던 파격이었지만, 젊은 스키피오는 장차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전략적 통찰력과 대중적 인기를 겸비한 스키피오는 이베리아에 도착하자마자 카르타고의 거점 도시인 카르타헤나를 기습했다. '신(新)카르타고'라 이름 지어진 이 도시는 중요했던 만큼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도 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헤나 항구의 일부가 썰물 시간대에 바닥을 드러낸다는 극비 정보를 활용해 단 하루 만에 도시를 점령했다(기원전 209년). 이베리아 전체가 격동했다.

스키피오, 카르타고를 향하다

로마 장군 스키피오의 흉상. /위키피디아
스키피오의 다음 목표는 안달루시아였다.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과 마고가 주둔하던 곳이었다. 그 둘은 스키피오의 적수가 아니었다. 기원전 206년 스키피오는 세비야 인근 일리파에서 카르타고의 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탁월한 리더는 언제나 멀리 내다보고, 핵심을 간파한다. 스키피오도 그랬다. 이제 이베리아에서 카르타고의 지배권은 붕괴됐다. 권력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언젠가 한니발 전쟁이 끝나고 나면, 로마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카르타고를 대신하게 될 터였다. 지금 카르타고가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고, 훗날 이베리아 전체를 지배하기 위한 거점이 필요했다. 이탈리카는 그렇게 탄생했다. 안달루시아의 동맥인 과달키비르강에서 가깝고, 오랜 페니키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카디스를 견제할 수 있는 곳에.

한니발의 배후가 무너졌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축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니발은 이탈리아 안에 있었고, 카르타고 역시 건재했다. 스키피오의 눈은 이제 카르타고 본국을 향했다. 오랜 전쟁을 끝낼 때가 된 것이다. 이탈리아 안에서가 아니라, 카르타고 성벽 앞에서.

한니발, 이탈리아를 떠나다

크로토네(Crotone)는 고대에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다. 오늘날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주(州)에 있다. 크로토네 근처에 카포 콜론나(Capo Colonna)란 유적지가 있다. 폐허에 가깝다. 발굴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너른 터 위에 덩그러니 신전 기둥 하나만이 눈에 띈다. 기둥의 높이는 8m가 넘는다. 투박하지만 강건한 도리아 양식이다. 신전은 그리스 여신 헤라에게 바쳐졌다. 당대에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장엄한 건축물이었다니, 세월이 무상하다. 신전보다 더 무상한 것은 한니발의 삶이다. 그는 평생을 '로마 타도'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살았다. 그러나 로마를 타도하는 데 실패했을 때 상처 입은 사자는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 한니발은 이곳 크로토네 항구에서 고향 카르타고를 향했다.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에서 로마군 7만명을 몰살했던 한니발. 그는 왜 떠나야만 했던 것일까?

한니발, 홀로 로마와 맞서다

한니발은 천재였다. 그의 용병(用兵) 앞에 로마군은 연전연패했다. 그의 외교 앞에 로마의 동맹 체제는 흔들렸다. 이탈리아 제2의 도시 카푸아는 로마를 배신했고, 시칠리아의 맹주 시라쿠사는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한니발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한니발이 아니라, 카르타고란 국가의 약점이었다. 그들은 서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로마와 싸우고 있었음에도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 언제나 당파심이 애국심을 이겼고, 개인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보다 중요했다. 한니발이 아무리 천재라 해도 개인의 힘만으로 로마 전체와 싸울 수는 없었다. 로마는 한니발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그의 근거지인 이베리아반도를 잠식해 들어갔다. 한니발에게는 원군(援軍)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오지 않았다.

한니발, 동생과 원군을 잃다

점차 한니발은 수세에 몰렸고, 이탈리아 남부에 발이 묶였다. 기원전 207년, 드디어 기다리던 원군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왔다. 동생 하스드루발이 사령관이었다. 한니발은 북상했다. 동생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가던 하스드루발의 밀서(密書)를 가로챘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의도를 간파당한 하스드루발은 메타우로스 강변에서 로마군의 기습을 받았다. 군대는 궤멸됐고, 사령관은 명예롭게 전사(戰死)를 선택했다. 로마군은 동생의 잘린 머리를 형의 진지에 던졌다.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둔 10년 만의 재회였다. 한니발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다.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의 흉상. /위키피디아
스키피오의 군대가 아프리카에 도착하자 카르타고 역시 종말을 느꼈다(기원전 204년). 한니발에게 귀환 명령이 내려졌다. 크로토네에 머물고 있던 한니발에게 명령이 전해졌을 때, 영웅은 이를 갈고, 신음을 토하고, 겨우 눈물을 참아냈다(리비우스·로마사). 그도 결국에는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니발은 자신의 말을 죽이고, 배를 탔다(기원전 203년). 이탈리아를 떠나기에 앞서 한니발은 카포 콜론나의 헤라 신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한 동판을 남겼다. 그는 떠나는 배 위에서 자신의 업적을 품은 헤라 신전을 바라봤을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을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는 실패했다. 로마는 살아남았다. 더욱 강해졌다. 이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쪽은 한니발과 카르타고였다.


위대한 두 장군, 북아프리카서 격돌

한니발은 이베리아에서 이탈리아로 갔고, 스키피오는 이탈리아에서 이베리아로 갔다. 각자의 어깨 위에 조국의 운명과 지중해의 패권이란 짐을 진 채였다. 이제 두 남자는 북아프리카의 자마에서 운명처럼 마주했다(기원전 202년). 역사가 리비우스의 표현대로 '그들의 시대뿐 아니라, 모든 앞선 시대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가장 위대한 두 장군'의 격돌이었다. 승리는 스키피오의 몫이었다. 그의 전술이 좀 더 유연했고, 그의 부대가 훨씬 강인했기 때문이다. 스키피오는 관대한 강화 조건을 제시했고, 한니발은 받아들였다. 사실상 포에니 전쟁의 종말이었다. 먼 훗날의 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년~기원전 146년)은 로마의 억지스러운 시비와 카르타고의 절망스러운 저항에 불과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승자는 거대한 제국으로 도약했다. 패자는 일개 상업 도시로 전락했다. 극명하게 운명이 갈린 것이다. 예외 없는 역사. 그래서 더 무섭다.


조선일보 A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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