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한다, 헌 옷에 담긴 그 사람의 체온을"

부산=정상혁 기자
입력 2019.07.11 03:00

핀란드 설치미술가 카리나 카이코넨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었다. 그녀 나이 열 살 때였다. "심장마비였다. 너무 무서워 식탁 밑에 숨은 나를 똑바로 바라본 채 아버지는 숨을 멈췄다. 그것이 평생의 죄의식으로 남아 있다. 이후 몇 년간 아버지 옷을 줄여 입었다. 아버지의 온기가 필요했고 그로 인해 내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원했다. 그리고 옷에서 진실로 그것을 느꼈다."

10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만난 카리나 카이코넨이 헌 옷 800장으로 만든 '우리는 당신의 날개' 앞에서 양팔을 활짝 벌리고 있다.이미지 크게보기
10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만난 카리나 카이코넨이 헌 옷 800장으로 만든 '우리는 당신의 날개' 앞에서 양팔을 활짝 벌리고 있다. 그는 이날 헌 옷더미에서 'Take-Off(날아오르다)'라고 쓰인 티셔츠를 발견하곤 "엄청난 우연"이라며 놀라워했다. /김동환 기자
핀란드 설치미술가 카리나 카이코넨(67)이 전 세계를 돌며 남성용 헌 셔츠와 외투 수백 벌을 가지런히 늘어놓거나 특정 꼴로 걸어둠으로써 일종의 '옷 조각'을 전시하는 이유다. "옷은 인간의 형태와 기억을 담고 있다. 옷은 '내가 여기 있었다'는 신호다. 벗어 두더라도 거기 닿아 있던 몸의 뜨거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오는 12일부터 11월 26일까지 열리는 핀란드 현대미술·디자인 전시 '핀란드 웨이브' 참석차 처음 한국에 온 그는 이번에 부산 시민이 기증한 옷 800벌로 만든 대형작을 선보인다. 미술관 2층 로비에 놓인 헌 옷가지가 높이 10m, 102평 공간을 채우는데, 소매가 서로 연결된 옷이 3층 난간에서 2층 바닥으로 이어진 길이 30m짜리 32개의 긴 노끈으로 엮여 얼핏 만국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목은 'We are your wings(우리는 당신의 날개)'. 지난해 벨기에 브뤼셀에도 'If I had wings(만약 날개가 있었다면)'를 설치한 그는 "인간은 진실로 서로가 필요하다"며 "연결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옷이 날개라지만, 그에겐 사부곡(思父曲)에 가깝다.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뒤 6년간 대학에서 의학물리를 공부했다. 사람의 치유를 돕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움은 불치였다. 아버지 사진을 꺼내 한참 바라보다가 이윽고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완성된 그의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 마법 같은 경험이 나를 미술로 이끌었다." 처음엔 그림을 그렸지만 "캔버스와 액자, 벽이 너무 좁게 느껴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유년 시절 껴입곤 하던 '아버지의 옷'을 기억해냈다. 당시 아버지의 옷과 유사한 것들을 벼룩시장에서 사들였다. 그 옷으로 어릴 적 함께 타고 다니던 낚싯배(1998)를 만들거나, 옛 직물 공장 건물 사이에 그림자(1999)처럼 걸어뒀다. 일련의 옷은 모두 포옹의 형태를 띤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꾼 적은 없다. 내가 사랑하는 건 새 옷이 아니라 헌 옷이고, 그 안에 담긴 사람이다."

칠레 산티아고 국립미술관에 전시된 '대화들'. /카리나 카이코넨 홈페이지
2000년에는 핀란드 헬싱키 대성당 앞에 열흘간 남자 외투 3000벌을 늘어놨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Way(길)'는 즉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여성 쪽에선 '왜 여성용 옷은 없느냐'며 성평등에 어긋난다고 격렬히 항의했다. 남성 쪽에선 '왜 남자 옷을 계단 깔개처럼 더럽히느냐'고 분개했다. 내 의도는 대성당(진실)을 향하는 길목에 옷(인간)이 있으며, 그 과정의 소중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해석하는 자가 곧 예술가다. '저게 뭐지?' '이게 예술이야?' 할 수 있다. 좋아하든 경멸하든, 평생 미술관에 가지 않는 수많은 사람에게도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게끔 하고 싶다."

전시 후 모든 헌 옷가지는 다시 벼룩시장으로 돌아간다. 그가 '환경친화적 작가'로 꼽히며 전체 핀란드 미술과 연결고리를 지니는 이유다. 다만 이번 부산 전시작의 경우 그 행방이 결정되지 않았다. "버려진 모든 것이 순환하기를, 그리하여 새 삶을 얻기를 원한다."


조선일보 A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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