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우리는 '식민' 극복 성공했는데 왜 실패한 나라처럼 행동하나

양상훈 주필
입력 2019.07.11 03:17

청구권 자금 5억달러는 당시 日 외환 보유액 24%… 그 돈으로 경제 기적 이뤄
1對29 GDP 격차 이제 1對3… 피해 의식 아닌 日帝 극복 성공한 자부심으로 일본 바라봐야 한다

양상훈 주필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포함된 청구권협정은 '한국의 일본에 대한, 일본의 한국 내 재산에 대한 국가나 개인 청구권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신 한국은 보상금으로 5억달러가 넘는 외화와 물자를 받았다. 이 돈은 '한강의 기적' 마중물이 됐다. 일본은 한국이 이 협정을 파기했다고 무역 보복을 하고 있다. 그해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 국교 정상화에 즈음한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엔 한일 관계와 우리 사회에 대한 박 대통령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지금도 되새겨볼 부분이 있다.

그는 '한 나라의 운명 개척엔 국제 정세에 적응하는 결단이 필요하다'며 '국제 정세에 역행하는 국가 판단이 어떤 불행을 가져왔는지는 조선 말엽 우리의 뼈저린 경험이 실증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우리 주변에선 1964년 중국이 핵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북한은 중·소를 이용해 군사력에서 한국을 앞서가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안보와 경제 발전을 위해선 자유세계 국력 2위로 부상한 일본과 손잡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누구와도 손잡아야 한다. 자유와 독립, 내일의 조국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어렵지만 과거의 감정을 참고 씻어버리는 것이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나의 확고부동한 신념이올시다'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수백 년간 일본은 우리 독립을 말살했고, 우리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우리 재산을 착취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그러나 이 각박한 국제사회에서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위한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읍니까'라고 했다. 그는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였다.

박 대통령은 한일 국교 정상화에서 과거 청산, 호혜 평등의 기본 관계 설정과 청구권 문제, 어업협정 문제, 60만 재일 교포 처우 문제, 문화재 반환에 주력했다. 그러나 일본은 완강했다. 무엇보다 한일 합방의 국제법적 위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이런 문제가 우리 주장대로 해결된 것은 아니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국익 확보에 최선을 다했다. 외교란 상대가 있는 것이고 일방적 강요가 안 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격렬했던 국내의 반대에 대한 생각도 솔직히 밝혔다. '굴욕적, 저자세, 군사·경제적 침략 자초, 심지어 매국적이라 비난한다. 이 주장들이 우리 정부의 대일(對日) 입장을 강화할 수 있어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만일 그 주장들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묻고 싶다.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 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먹나. 이것이 바로 굴욕적인 자세다. 일본 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는 이 열등의식부터 버려야 한다. 우리의 근대화 작업을 좀먹는 가장 암적인 요소도 바로 패배주의와 열등의식 그리고 퇴영적인 소극주의, 비생산적인 사이비 행세'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아무 실력 없이 반일(反日)만 내세우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속은 텅텅 비고도 겉치레만 번지레 꾸미려는 명분주의, 언행 불일치주의'라고 했다.

1965년 일본의 외환 보유액이 21억달러였으니 우리가 받은 보상금 5억달러는 거의 4분의 1에 이르는 돈이었다. 박 대통령은 '다시 일본 침략을 당한다는 열등의식도 버려야 하지만 당장에 우리가 큰 덕을 볼 것이라는 천박한 생각도 절대 금물'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앞으로 결과가 좋을지 불행할지는 우리 자세와 각오에 달려 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리사욕을 앞세우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제2의 을사조약이 된다. 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같이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식민지 독립국 중에 외국에서 받은 돈으로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발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적'이다. 1965년 박정희가 국민 모두의 각성을 촉구했던 때 한국의 GDP는 일본의 29분의 1이었다. 작년엔 그 격차가 3분의 1로 줄었다. 식민 피해국이 가해국을 상대로 이렇게 확실하게 과거를 청산·극복한 사례는 한국 외에 없다. 그런데 우리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 마치 극복에 실패한 나라처럼 행동한다.

박 대통령은 '일본 국민들에게도 밝혀 둘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와 그대들 간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손을 잡게 된 것은 다행이다. 과거 일본 죄과의 책임이 오늘 일본 국민에게 있다고는 생각 않는다. 그러나 국교 정상화의 이 순간에 침통하고 착잡한 심정으로 구원을 억지로 누르고 다시 손을 잡는 한국 국민들의 이 심정을 단순하게 보아 넘기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그대들의 한국 국민에 대한 자세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라는 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에 다시 싹트면 이번에 체결된 제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요즘 혐한이 유행이라는 일본 국민과 아베 총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조선일보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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