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사물극장] [106] 전 재산을 기부한 유일한의 '버드나무 목각화'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입력 2019.07.11 03:10
1904년 봄, 한 소년이 제물포에서 대한제국 순회공사의 손을 잡고 멕시코행 여객선에 올랐다. 이 배에는 미국 유학을 가는 소년들과 하와이로 가는 이민 노동자들도 타고 있었다. 9세 소년은 미국 중부의 네브래스카주(州)에 사는 미국인 자매에게 맡겨졌다. '리틀 유'라고 불리던 이 소년이 '유한양행'을 세운 기업가 유일한(1895~1971)이다.

소년은 식당 심부름, 신문배달, 구두닦이 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때 박용만 등이 세운 '소년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학교에서는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북간도로 이주한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100달러를 대출받아 송금했다. 유일한은 이 융자금과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변전소에서 일했다.

유일한은 미시간대학에서 법학과 회계학을 전공했다. 비단, 손수건, 부채, 찻잔, 쟁반 등 동양의 일용 제품을 도매점에서 사다 중국인에게 되팔아 돈을 모았다. 이 돈을 종잣돈 삼아 대학 동창과 동업으로 '라초이 회사'라는 동양 식료품 판매 회사를 세웠다. 특히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 판매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소년은 낯선 땅에서 '신산(辛酸)한 유랑 세월'을 딛고 성공 신화를 썼다. 유일한은 미국을 떠날 때 서재필 박사가 건네는 '버드나무 목각화'를 선물로 받았다. 유한양행의 상표로 널리 알려진 그림이다. 1927년 아내인 소아과 의사 호메리와 함께 돌아와 '유한양행'의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서양 의약품을 팔던 회사를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제약 기업으로 키웠다.

1971년 3월 11일 오전 11시 40분, 유일한은 눈을 감았다. 유품은 단출했다.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 딸에겐 땅 5000평을 물려주고, 아들에겐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 살라'는 말만 남겼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유언장은 부를 대물림하는 사회에 유쾌한 파장을 일으켰다.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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