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됫박'이 다섯 겹? 여기는 DDP 옆 참기름 공장

채민기 기자
입력 2019.07.10 04:06

'쿠엔즈버킷' 건축가 문훈이 지은 도시 방앗간
불탑으로도 보이는 독특한 건물… 여행 정보 사이트서 명소로 각광

알리바바가 "열려라 참깨!" 했을 때 동굴 문이 이렇게 열리지 않았을까. 열림 버튼을 누르자 유리문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굵은 쇠막대로 살을 짜 넣은 문이 일반적인 건물 출입문보다 크고 육중했다. 설계자인 건축가 문훈(51)의 최초 구상은 진짜로 "열려라 참깨!" 하면 음성 인식으로 문이 열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여러 사람 드나들 때마다 주문을 외기가 번거로워 실현되진 못했지만.

실없는 이야기 같은데 참기름 회사 건물이라니 그랬을 법도 하다. 지난 4월 서울 광희동에 들어선 이 건물은 고급 참기름·들기름을 만드는 벤처기업 '쿠엔즈버킷'의 매장을 겸한 도심형 공장. 이를테면 도시 방앗간이다. 쿠엔즈버킷은 기존 참기름보다 낮은 온도에서 깨를 볶는 '저온 압착' 방식으로 기름을 짠다. 맛과 향이 은은해 올리브유처럼 여러 요리에 두루 쓸 수 있다. 미국 뉴욕의 미쉐린 레스토랑 두 곳에서 이 기름을 쓴다. 홍콩·싱가포르에서도 팔린다.

됫박 5개를 쌓아올린 모양의 쿠엔즈버킷 공장. 사선(斜線)을 외관 전체의 무늬로 활용했다. 문훈 건축가는 “불탑(佛塔)의 느낌도 디자인에 담았다”고 했다. /사진가 김창묵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기름에 이어 이번에는 새로 지은 광희동 방앗간이 명소로 떠올랐다. 지난달 글로벌 디자인 웹진 '디자인붐'이 "자하 하디드의 DDP가 있는 동대문시장 근처에 됫박을 쌓아 놓은 듯한 기름 회사 건물"로 소개했다. 5월엔 한국 여행 정보 사이트 '코네스트'에서 쿠엔즈버킷이 주간·월간 '인기 랭킹' 1위에 오르면서 일본인들 발걸음이 부쩍 늘었다. 쿠엔즈버킷 박정용(51) 대표는 "하루에 일본 관광객이 20~30팀 정도 온다"고 했다.

20여년 전 군대 시절 선후임 사이였던 건축주와 건축가는 '짬밥'은 차이 났으나 동갑내기여서 친하게 지냈다. 제대하고도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다가 2017년 박 대표가 설계를 부탁했다. 건축가는 회사 이름에도 들어가는 버킷(됫박)을 직감적으로 떠올렸다. 아래가 살짝 좁은 네모꼴 됫박 5개를 쌓아올리듯 건물을 올렸다. 지하 1~2층에 원료 창고와 작은 모임 공간이 있고 1층은 매장, 2~3층은 기름 공장, 4층은 베이커리, 그 위는 작은 옥상 정원이다.

안에 들어서면 천장 쪽이 넓어서, 좁은 건물이지만 답답하지 않다. 출입문도 건물 한쪽 모서리를 통째로 파내듯 큼직하게 내서 개방감을 극대화했다. 독특한 건물 형태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사선(斜線)을 출입문과 유리창, 콘크리트 외벽 전체에 넣었다. 외형에서 생동감과 리듬감이 느껴지도록 한 디자인이다.

기름병이 가지런히 진열된 쿠엔즈버킷 1층 매장. 천장이 높고 출입문이 커서 공간이 트여 보인다. /사진가 김창묵

문훈은 "설계할 때 건축주 개인의 인상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이라고 했다. 그의 눈에 박정용 대표는 동자승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외관에 불탑(佛塔) 같은 느낌을 담았다. 1층 매장 벽면을 가득 메운 기름병을 보면서도 그는 말했다. "대웅전 벽에 늘어선 작은 불상들 같지 않나요?"

건축가 문훈은 황소처럼 뿔이 솟은 펜션, 분홍색 막대사탕을 닮은 주택 같은 건물들로 유명하다. 대담한 형태와 색채 사용에 거침이 없다. 튄다는 소리를 자주 듣고 건축계의 이단아 내지 괴짜로 불린다. 문훈은 "건물과 주변 환경의 조화는 중요하지만 꼭 형태나 색채가 비슷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쿠엔즈버킷 건물은 주택가 좁은 골목길에 있어요. 주변의 벽돌 건물과 모양이 다르지만 주택과 마주 보는 쪽으로는 창문을 내지 않고 이웃의 사생활을 존중했죠."

건물은 어느새 동네에 녹아들었다. 매장 앞 골목에 의자를 늘어놓고 미니 콘서트를 열고, 이웃에서 감자를 쪄서 가져오기도 한다. "요샌 쿠엔즈버킷 지하에서 동네 반상회도 한다니 이만하면 좋은 관계가 만들어진 것 아닐까요?"


조선일보 A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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