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의 윔블던 러브] 선수는 흰옷, 관중은 정자세… '테니스의 대성당' 윔블던

윔블던=양지혜 기자
입력 2019.07.09 03:00 수정 2019.07.09 11:04

미사 집전하는 것처럼 수많은 법도 지키는 전통

윔블던=양지혜 기자
윔블던은 영국 런던 도심에서 템스강 건너 남서쪽으로 11㎞가량 떨어진 동네 이름이다. 1877년 처음 시작해 올해로 133회를 맞이한 이 테니스 대회의 공식 이름은 더 챔피언십(The Champion ships). '윔블던에서 열리는 챔피언십' 줄임말이 우리가 아는 '윔블던'이 된다(참고로 경기장과 가까운 지하철은 윔블던파크역이 아니라 사우스필즈역). 프랑스오픈이나 호주오픈처럼 국가명을 대회 이름으로 쓰지 않고 오직 정관사(The)만 붙인 것부터 영국인들의 자부심이 드러난다. 복수형(-s)은 남녀 단식과 복식을 포함해 총 15개 종목 챔피언을 가린다는 의미다.

윔블던은 '테니스의 대성당'이다. 매일 잔디 코트 18곳에서 테니스라는 종교를 위한 미사가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집전된다. 미사에는 지켜야 할 법도가 많다. 선수는 흰옷만 입고, 경기장 안엔 간판이 없다. 전광판에는 오직 선수 이름(국적 표시도 없다)과 시간, 그리고 세트·게임·포인트 점수만 뜬다. 잔디 코트로 향해야 할 시선을 분산시키는 그 어떤 것도 용납 안 한다.

관중석 사이엔 베이지색 제복을 입은 소방관이 있다. 다리를 꼬고 앉거나 앞좌석에 발 올린 사람, 양산 펴서 뒷줄 시야를 가린 사람, 음료수 캔을 난간에 두는 사람 등 이들이 보기에 '자세 불량'인 관중을 잡는 게 임무다. 대신 무더위에 누가 쓰러질 기색이면 달려와 응급조치를 한다.

제복 입은 소방관(왼쪽)과 해군 장병(오른쪽)이 지난 5일 윔블던 센터코트에서 열린 남자 단식 3회전 경기에서 관중들을 살피는 모습. /윔블던=양지혜 기자
심판은 크림색 긴바지와 파란 긴소매 셔츠만 입는다. "덥다고 소매를 걷어선 안 되고, 경기 중엔 물도 못 마셔요." 윔블던 자원봉사 20년 경력인 헤더씨가 설명했다. 관중도 복장 에티켓이 있다. 부잣집 다과회에 초청받은 것처럼 다들 차려입고 온다. 10분만 밖에 있어도 살갗이 불타는 여름 땡볕인데, 재킷까지 걸친 사람들이 흔하다.

볼 퍼슨(ball person)은 미사 집전을 거드는 복사(服事)들이다. 오전 9시 반 센터코트 앞에 가면 볼 퍼슨들이 열중쉬어 자세로 일렬로 대기한다. 여학생은 양 갈래 머리, 남학생은 짧게 깎은 머리에 제식 행렬하는 군인들처럼 걷는다. 볼 퍼슨은 영국 청소년들이 선망하는 꿈이다. 조직위원회가 엄선한 영국 중·고교에서 만 15세 이상 학생 1000여명이 지원해 그중 250명만 뽑히고, 대회를 앞둔 5개월간 '존재하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법을 배운다. 투명인간처럼 선수 옆에 서서 공과 수건을 무표정으로 내밀지만 가끔은 얼굴에 말풍선이 떠다닌다. "우와 진짜 조코비치네."

변하지 않는 것이 윔블던의 전통이다. 온라인 시대인데도 취재 신청을 수기(手記)로 받고, 허가 서류는 우편으로 3개월 뒤에 왔다. 경기장 네트 높이는 줄자 대신 옛날 나무 자로 재고, 입장객 수 측정은 QR 코드가 아니라 사람이 계수기로 센다. 윔블던의 명물인 생크림을 얹은 딸기는 별로 달지도 않은데 전통이라는 이유로 28t이나 팔려나간다.

조금씩 변하는 것도 있다. 윔블던은 올해부터 여자 선수 이름 앞에 결혼 여부를 따지는 '미스(Miss)'나 '미시즈(Mrs.)' 호칭을 안 붙인다. 남녀 상금 차별도 12년 전 (4대 그랜드슬램 중 가장 마지막으로) 없앴다. 윔블던 홍보 담당관은 "전통도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백인들의 대회로 시작한 윔블던은 이제 흑인 심판과 중국계 볼 퍼슨, 인도계 소방관, 70여국 선수와 코치, 그리고 테니스를 사랑하는 세계인을 위한 장소로 변했다. 라켓 두 개와 공 하나로 드린 8일 미사에선 8강행 티켓 주인공들이 정해졌다.


조선일보 A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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