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극단으로 갈린 '저녁의 삶'

최아리 기자 김승현 기자
입력 2019.06.27 03:00 수정 2019.06.27 09:46

[주52시간제 1년의 명암] [1] 월급쟁이 인생 양극화
대기업 75% "정시퇴근 정착"… 가족과 저녁 먹고 취미생활 즐겨
中企 생산직은 수당 줄어… "1년에 한달치 월급 못받고 사는 셈"

#1. GS건설 전지환(32) 과장은 매일 오후 5시 30분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상사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6시면 사무실 전체에 전기 공급이 끊겨, 일을 더 할 수도 없다. 퇴근 후엔 곧바로 스포츠센터에 가서 근력운동을 한다. 주(週)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작년 7월 60만원을 내고 골프·헬스장 연간 회원권을 끊었다. 운동하고 와선 집에서 1시간 영어 공부를 하고, 영화를 감상하다 11시쯤 잠이 든다. 전씨는 "그동안 자기 계발을 하려면 주말 시간을 내야 했는데, 지금은 업무든 공부든 평일에 다 하고, 주말은 온전히 가족과 보낸다"고 했다. GS건설 직원 평균 연봉은 8200만원이다.

#2. 충청권 소재 한 중견 제조업체에서 포장반으로 일하고 있는 윤모(60대)씨는 지난달 월급 220만원을 받았다. 올해 1월까진 280만~300만원이었지만, 회사가 2월부터 주 52시간제를 도입해 금요일 잔업과 주말 근무가 없어지면서 월급이 줄었다. 이 회사는 사원이 200여명으로 아직 주 52시간제 의무 적용 대상이 아니지만, 내년 강제 시행을 앞두고 미리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했다. 월급이 줄어든 윤씨는 본인과 남편, 그리고 장녀(長女)라는 이유로 납부해온 어머니 보험을 모두 해지했다. 그렇게 15만원 지출을 줄였다. 좋아하던 '5일장 구경'도 끊었다. 윤씨는 "둘러보다 보면 뭐라도 사게 되니까"라고 했다.

작년 7월 문재인 정부가 300인 이상 사업장 약 3500곳을 시작으로, 주 52시간 근로제 단계적 의무 도입에 착수했다. '워라밸'(일과 개인적인 삶의 균형), '저녁 있는 삶'을 약속했다. 그 후 1년. 본지가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저녁 있는 삶'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다만 그 온기(溫氣)는 일부의 이야기에 그쳤고, 경제적 냉기(冷氣)를 느끼는 이도 많았다. 월급쟁이들의 삶은, 어떤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지난 1년간 극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국내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의 합자(合資)회사 과장 김모(41)씨는 1년째 매일 오후 7시면 서울에서 칼퇴근, 경기 남양주 자택에서 아내, 초등학생 두 아들과 저녁을 먹는다. 8시부터 한 시간은 동네 스포츠센터에서 골프를 친다. 김씨는 "작년 초만 해도 부장 눈치 때문에 일이 없는데도 회사에 남아 개인 PC로 몰래 프로야구를 끝까지 봤다"며 "언론에서 문 정부가 경제를 망친다고 매일 대서특필하지만, 나는 저녁 있는 삶을 만들어준 그 하나만으로도 다음 대선은 무조건 민주당"이라고 했다. 연봉은 세전(稅前) 9000여만원이다.

대기업엔 주 52시간제가 빠르게 정착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 1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기업 75%가 "정시 퇴근 분위기가 정착됐다"고 답했고, 50%가 "업무 집중도가 향상됐다"고 했다.

수혜자는 주로 사무직이다. 지난 4월 서울 종로구의 한 헬스장에서 만난 김희숙(45) 매일유업 영업지원실 부장은 "잡담 시간 줄이고 점심 시간 줄여서 집중적으로 일하니 야근 없이도 다 되더라"고 했다. 김씨 회사는 사내(社內) 복지 프로그램에 매주 월·수·금 오후 6시 반 그룹 운동을 신설했다. 김씨는 "관리자들이 운동을 하러 나가니 눈치 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김씨 스스로는 늘어난 시간을 대부분 남편, 고3이 된 아들과 보내는 데 쓴다.

SK텔레콤은 지난 4월부터 매월 셋째 주 금요일엔 전 직원이 오후 3시에 조기 퇴근하는 '수퍼 프라이데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 회사 부장급 직원은 "급한 업무가 있는 직원이 아니면 모두 다 3시에 퇴근하는 분위기"라며 "주 40시간제 도입 이후 삶의 질이 정말 좋아졌다"고 했다. 국내 대기업 연구원인 강민형(33)씨는 "예전에는 일이 없어도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40시간을 초과한 시간을 차곡차곡 모아서 휴가로 바꾸는 일종의 '마일리지'처럼 활용하는 직원이 늘었다"고 했다.

서울연구원의 지난 23일 발표 자료를 보면,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해 서울시민이 꼽는 긍정적인 측면 1위는 '여가 시간 확대로 삶의 질 향상'(68.6%)이었다. 반면 부정적 측면 1위는 '초과 수당 줄어 임금 감소'(50.2%)였다.

부정적인 측면은 ‘잔업 수당’ 비중이 큰 생산직 근로자나 중견·중소기업에서 두드러진다. "저녁은 생겼지만, 쓸 돈이 없다"는 것이다. 대전의 한 제조업체 직원 안모(28)씨는 "기본급은 올랐지만 수당이 줄어 지난해 대비 임금이 20만~30만원 줄었다. 월(月) 기준으로는 크지 않아 보이지만 1년에 한 달 치 월급이 빠지는 것"이라고 했다. 2017년 결혼한 안씨는 월급이 줄 것을 예상 못 하고 '원리금 동시 상환 방식'으로 돈을 빌려 집을 산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안씨는 "축구화 사 모으던 취미는 포기한 지 오래고, 아내와 둘이서 3만원 넘게 나오는 식당은 잘 안 가게 된다. 빨리 빚을 갚아야 아이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일을 하고도 일했다고 기록하지 못하는 '유령 근무'도 생긴다. 서울의 한 외국계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김모(28)씨는 "예전에는 (상급) 매니저만 승인하면 됐는데 이제는 위 간부까지 두 차례 더 거쳐야 한다. 주 40시간에 자율적으로 맞추면 되는데 업무가 몰리는 날은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하고도 눈치가 보여 야근 결재를 못 올린다. '무료 봉사'를 하는 셈"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업종·직무와 무관하게 일괄적으로 적용한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산업별, 직업별 특성을 면밀하게 따지지 않고 근로시간을 정부가 일률적으로 묶어버리는 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수당이 준 직장인들은 경제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직장인들이 한 직장에 헌신하는 대신 투잡, 스리잡을 뛰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A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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