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거 후 일제에 쫓긴 김구, 상하이 탈출 경로 나왔다

김성현 기자
입력 2019.06.25 03:46

[백범 서거 70주기]
김구의 상하이~자싱 도피 경로, 도진순 교수가 '백범의 길'서 밝혀

김구, 조지 애시모어 피치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백범(白凡) 김구(金九) 임정 국무위원이 일제 감시망을 피해 상하이를 탈출한 경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회장 김형오)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백범 서거 70주기를 맞아 26일 발간하는 '백범의 길'(전 2권·아르테)을 통해서다. '백범의 길'은 한·중(韓·中) 역사학자와 전문가 11명이 임정의 항일 이동 경로를 답사하며 집필한 책이다.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이 책에 실린 논문 '생사기로에서의 국제 연대―피치 부부와 김구, 피신과 탈출 루트'에서 1932년 5월 중순 백범이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한 미국인 목사 조지 애시모어 피치(1883~1979) 부부의 도움으로 상하이를 벗어나 자싱(嘉興)으로 향하는 과정을 밝혔다. 도 교수는 '백범일지' 해제를 쓴 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다.

윤봉길 의거 직후 백범 일행은 피치 부부의 집으로 피신해서 10여일간 머물렀다. 당시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도산 안창호가 체포되는 등 일제의 혹독한 탄압이 시작됐다. 백범에게도 당시 돈 60만원의 현상금이 걸렸다. 일본인으로 보이는 정탐꾼이 피치 부부의 집에 다녀가자 백범은 상하이 탈출을 결심했다. 백범이 5월 15~16일 항저우에서 열린 임정 국무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보아 그 직전 상하이 탈출을 감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 교수는 백범 일행의 탈출 경로를 상세하게 소개했다. 우선 피치 목사가 근무지인 상하이 YMCA 건물을 출발해서 인근 자택에서 백범 일행을 태웠다. 피치가 운전을 맡았고, 백범 일행은 피치의 아내 제럴딘과 뒷자리에 앉았다. '가족 소풍을 가는 듯한 태평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①미국인 목사 피치가 상하이 YMCA에서 나와 ②백범 일행을 태운 뒤 ③화이하이중로와 ④바오칭로를 거쳐 ⑤헝산로 방향으로 향했다. ⑥쉬자후이 개천을 따라서 가다가 ⑧신룽화역에서 기차를 탔다. /이한수 기자·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그 뒤 백범 일행의 차량은 화이하이중로(淮海中路·당시 샤페이로)와 바오칭로(寶慶路·당시 바오젠로)를 거쳐 헝산로(衡山路·당시 베이당로)로 향했다. 헝산로를 벗어난 백범 일행은 쉬자후이(徐家匯) 개천을 따라서 난 길로 동쪽으로 가다가 인도교에서 내렸다. 개천은 현재 복개되어 자오자방(肇嘉浜)로가 됐다. 백범 일행은 프랑스 조계지 서남쪽에 있던 철도 교통의 요지인 신룽화역(新龍華站)에서 기차를 타고 자싱으로 향했다. 현재 신룽화역은 없어지고, 2006년 상하이남역이 생겼다.

도 교수는 백범의 상하이 탈출이 갖는 의미에 대해 "중요한 건 한국 독립운동에는 단순히 한국인들만의 반일(反日) 투쟁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중국인은 물론 미국인 등 서양인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존재했다는 점"이라고 풀이했다. "인간의 자유, 생명에 대한 존중, 민족을 넘어서는 인류애 등 약소국의 민족 운동은 이런 보편적 토대와 결합해야만 세계사적 의미가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치 부부는 1964년 회고록을 발간했다. 이 회고록에서 아내 제럴딘은 백범의 탈출을 도운 일에 대해서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게 우리의 역할은 생명을 구하는 것, 협력하는 것, 만인에게 평화와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피치 목사는 1947년 한국 YMCA 총간사로 임명되어 경교장에서 백범과 재회했다. 피치 부부는 1952년 대한민국 정부의 문화공로훈장을 받았고, 1968년에는 건국훈장을 받았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26일 서울 용산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백범 서거 70주기 추모식을 연다.


조선일보 A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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