낌새 채고 '야반도주' 정태수 아들, 약속 지킨 에콰도르 덕에 잡았다

박현익 기자
입력 2019.06.24 18:27
'범죄인 인도 조약' 없는 에콰도르서 鄭씨 검거 어떻게?
검찰, 송환 거부되자 '추방시켜 잡자'로 작전 전환
눈치챈 정씨, 해외로 ‘야반도주’ 시도하다 결국 덜미

하마터면 또 놓칠 뻔했다. 1998년 회삿돈 300억여 원을 빼돌린 혐의로 수사를 받던 도중 잠적한 정한근(54) 전 한보그룹 부회장. 검찰은 그가 에콰도르에 체류 중인 사실을 확인해 송환을 요청했지만 에콰도르 대법원은 이를 거부했다. 한국과 에콰도르 간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씨는 우리 검찰이 자신을 잡아들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또다시 도망치려 했다. 지난 18일 에콰도르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야반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다행히도 정씨는 미국으로 가던 도중 경유지인 파나마 공항에서 붙잡혔다. 검찰은 정씨를 국내로 송환하는 데 성공했고, 곧장 그에 대한 구속영장을 집행해 서울구치소에 수감시켰다.

도피 21년 만에 중미 국가인 파나마에서 붙잡힌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아들 정한근 씨가 22일 오후 국적기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연합뉴스
각 나라는 해외 도피 사범들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간에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을 맺으면 도피한 범죄자를 자국으로 송환해 달라고 타국의 법무·외교 당국에 요청할 수 있다. 한국은 지난 1990년 호주를 시작으로 미국과 중국, 일본 등 70여 개 국가와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정씨처럼 에콰도르 같이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로 도피한 범죄인을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검찰로부터 이번 정씨 송환 과정을 자세히 들어봤다.

◇‘주고 받고’ 상호호혜로 조약 없이도 범죄인 인도 청구 가능
정씨 추적부터 송환까지 일련의 과정을 총괄한 대검 국제협력단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조약을 맺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국제법상 일반원칙인 ‘상호주의’에 따라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상호주의란 상대국이 어떤 태도나 결정을 취하는지에 따라 동일한 수준의 대응을 한다는 외교 원리를 말한다. 우리 ‘범죄인 인도법’에서도 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경우 상호주의를 적용해 송환을 요청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단 ‘우리도 유사한 범죄 인도 청구에 응한다는 보증을 할 경우’라는 조건을 달고 있다.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하게 되면 각국 사법 당국의 판단에 따르게 된다. 우리는 고등법원에서 송환 여부를 결정하지만, 에콰도르는 대법원에서 판단한다. 대검 관계자는 "국가간 관계가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청구가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며 "다만 정씨를 부를 수 있는 공식적인 수단은 범죄인 인도 청구뿐이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에콰도르 대법원은 지난 4월 범죄인 인도 조약 미체결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에콰도르에서는 정씨를 처벌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송환을 거부했다고 한다. 우리는 범죄자가 해외로 도피하면 공소시효를 정지시킬 수 있지만, 에콰도르는 정치범에 한해서만 공소시효가 정지되기 때문에 상호주의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과정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정씨가 이 사실을 알면 또다시 자취를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검사들이 현지로 출장을 가서 에콰도르 외교부와 내무부, 대검, 대법원 등을 순차로 방문해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반응이 만만치 않았다.

에콰도르 대법원의 송환 거부 결정 이후 우리 검찰은 정씨를 에콰도르에서 추방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에콰도르 밖으로 내보내면 검거할 다른 방도가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마침 정씨는 에콰도르 체류비자 기간이 만료됐고, 부정하게 발급받은 미국 시민권으로 에콰도르에 입국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대검은 정씨가 비자를 연장하려고 하다 당국으로부터 승인이 나지 않자 낌새를 차리고 도주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검 관계자는 "추정일 뿐 정확한 경위는 정씨를 상대로 조사해봐야 한다"고 했다.

1999년 2월 국회 환란특위의 경제청문회에 정태수 전 한보회장이 하얀 옷을 입고 휠체어에 탄 채 증인으로 출석했다. /조선DB
◇에콰도르 "鄭 출국시 알려준다" 약속은 지켰다
정씨는 비행기 탑승엔 성공했지만, 도주에는 실패했다. 대검 관계자는 "에콰도르 측에서 (정씨 송환은 못해도) 정씨가 출국하려 할 때 우리에게 즉시 알려준다고 약속을 했다"며 "그 약속에 따라 정씨의 경로를 미리 파악해 붙잡을 수 있었다"고 했다. 정씨가 지난 18일 새벽 4시 23분 비행기를 타기로 예정됐고, 우리 검찰은 이보다 1시간 앞서 이 사실을 전달받았다. 정씨는 파나마를 거쳐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가려했으나 우리 검찰과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 파나마 이민청 등의 공조로 파나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구금돼 국내로 송환됐다.

검찰은 정씨 외에도 해외로 도주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의 생사(生死)와 소재지 등도 파악 중이다. 정 전 회장이 살아있다면 현재 나이가 96세다. 다만, 정씨는 검찰에 "아버지가 작년 에콰도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내가 돌아가실 때 곁을 지켰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말의 사실 관계를 파악 중이다. 대검 관계자는 "진술 내용과 상관 없이 정 전 회장의 그간 행적과 관련한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추적 중"이라며 "이르면 이번 주 안에 정리해서 밝힐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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