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동굴에 새긴 화랑 이름에서 고구려 멸망사를 읽었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9.06.19 03:00

[169] 점말동굴 화랑 각자(刻字)와 고구려 망국사

어느 나라가 됐건 망국(亡國)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권력이 집중되고, 권력층 판단력이 흐려지고, 그 흐리멍덩한 권력 눈을 가리는 저질 정치배들의 농단과 국력 소진, 그리고 멸망. 조선 망국이 그러했고 고려왕국이 그렇게 멸망했다.

고구려와 백제 망국도 똑같았다. 신라는 반대였다. 명징한 판단력과 결단력,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권력층의 책임감이 최약체 신라를 결승전 승자로 만들었다. 특히 군사 대국 고구려가 망해버린 풍경은 어이가 없다. 문자가 없던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이 살던 충청북도 제천 점말동굴에서 고구려 망국사를 엿본다.

점말동굴과 신라 엘리트의 맹세

'서기 576년 진흥왕 37년 봄에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서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서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후에 발탁해서 쓰려고 하였다.(중략) 다시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576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 산68-1번지에 있는 점말동굴에는 구석기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미지 크게보기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 산68-1번지에 있는 점말동굴에는 구석기부터 사람이 살았다. 삼국시대 신라 화랑들이 동굴 입구에 새겨넣은 이름들은 소속도 없이 이름뿐이다. 소속은 그저 '신라'였다. 1500년 전 최약체국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상류층 결기를 엿볼 수 있다. 동시에 너무나도 순식간에 멸망한 고구려 권력층의 무책임도 읽을 수 있다. /박종인 기자
신라가 한창 세력을 확장하던 진흥왕 때 화랑이 처음 창설됐다. 처음에는 남모와 준정이라는 여자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두 여자가 질투 끝에 치정살인극이 벌어지자 남자를 '곱게 꾸며' 우두머리로 삼았다. 이들은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김대문은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라고 하였다.' 이들을 이끈 지도 이념은 '충성'과 '효도'와 '우정(信)'과 '임전무퇴(臨戰無退)' 그리고 '가려서 죽인다(살생유택·殺生有擇)'였다.(세속5계)

이 이야기가 삼국 통일의 시작이요 끝이다. 통일기 신라 지도자는 모두 화랑에서 나왔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도 화랑이고 그와 함께 통일을 이룬 김유신도 화랑이었다. 국가 공동체를 위해 그들과 함께 먼저 목숨을 건 이들도 모두 화랑이었다.

그 화랑들이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이' 다닌 곳 가운데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 산68-1번지가 있다. 지금도 도로명 주소가 없을 정도로 산중(山中)이지만, 그때도 그랬음이 틀림없다. 그 번지를 찾아가보면 2층 동굴이 뚫린 절벽이 나온다. 이름은 점말동굴이다.

문자가 없던 구석기 시절 사람들이 먹다 버린 코뿔소와 사슴뼈, 뼈로 만든 바늘 따위가 나왔던 이 구석기 유적지에서, 화랑들은 심신을 수련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무예를 닦았다.

화랑이 뭔가. 신라 청소년으로 구성된 심신 수련 조직이다. 계급에는 제한이 없었다. 화랑 우두머리 국선(國仙) 중 하나였던 미시(未尸)는 조실부모하여 성도 모르고 길거리에서 떠돌던 고아였다.('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 미시랑') 일단 화랑이 되면 그들은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이 점말동굴에 와서 이름을 새긴다. '正郞(정랑)', '烏郞(오랑)', '金郞(금랑)', '祥蘭(상란)'…. 숱하게 이름이 발견되지만, 어느 하나 자기 소속도 자기 고향도 밝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신라라는 공동체밖에 없었다. 21세기 시각에서는 끔찍한 전체주의적 집단이지만, 1500년 전 신라에는 없어서는 아니될 조직이었다.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 과부들이 군량미 수레를 끌고 어린아이가 군사용 밭을 경작한다.'(671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당 총관 설인귀가 왕에게 보낸 편지')

언제나 전시(戰時)였다. 민족 개념이 없던 삼국시대 세 나라는 국익을 위해 합종연횡했다. 때로는 적이 되고 때로는 동지가 되었다. 소시민은 행복을 추구했지만, 상류층은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신라는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약했다.

연개소문의 완벽한 쿠데타

642년 10월 고구려 대대로(수상)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연개소문은 포악하기로 소문이 나 있던 실력자였다. 그래서 왕과 귀족이 몰래 죽이고자 논의하다가 일이 새어나갔다. 이에 연개소문은 자기 성 남쪽에서 잔치를 열고 참석한 귀족을 모두 죽였다.(642년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 곧바로 연개소문은 궁궐로 말을 달려 영류왕을 죽이고 시신을 토막 내 도랑에 버렸다. 그날 죽은 귀족은 100여 명(삼국사기)이라고도 하고 180여 명(일본서기)이라고도 했다.

점말동굴 외벽에 새겨져 있는 화랑들 글씨.이미지 크게보기
점말동굴 외벽에 새겨져 있는 화랑들 글씨. '大究義節(대구의절)'은 서약이나 다짐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진한 기자
중원대 한국학과 서영교 교수는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쿠데타'라 불렀다. 그 겨울날 하루아침에 전통적인 고구려 귀족 집단 지도 체제가 소멸해버린 것이다.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왕위에 앉히고 자연스럽게 일인 독재로 나라를 경영했다. 칼을 다섯 개를 차고 말을 타고 내릴 때는 귀족 출신 무장을 엎드리게 하고 밟았다. 사람들은 달아나기를 구덩이나 골짜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구당서', '삼국사기' 등)

연개소문의 패착

명징한 사람도 권력이 집중되면 명징함을 잃는다. 연개소문 또한 그랬다. 천하의 무장이며 배짱 두둑한 인물이었지만, 큰 실수를 저질렀다. 평양을 찾아온 화랑 출신 신라 장관 김춘추를 옥에 가둬버린 것이다. 바로 그해 백제가 신라를 쳐서 김춘추 사위가 성주로 있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사위 김품석 부부는 목이 베여 부여성 감옥 바닥에 파묻혔다. 이에 이찬(伊湌) 김춘추가 선덕여왕에게 청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한 것이다. 김춘추가 말했다. "대국(大國)의 군사를 얻어서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연개소문 꼭두각시였던 보장왕은 "죽령 땅을 반납하면 돕겠다"고 답했고 김춘추는 거부했다. 김춘추가 수감됐다는 소식에 김유신이 결사대 1만명을 끌고 한강을 넘었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풀어줬다.(642년 '삼국유사' 신라본기 선덕왕11년)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와 격전을 앞둔 고구려였다. 그런데 남쪽 국경을 맞댄 신라를 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배후의 신라를 적대 세력으로 돌린 것은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2 고대') 고구려 대군은 남과 북으로 분산돼 이중으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고구려는 그날 멸망의 문을 열었다.

오천 결사대 對 오만 결사대

곳곳마다 "목숨을 건다"고 맹세하고 다니는 화랑이 운명을 건 전쟁을 벌였다. 작게는 화랑 김춘추의 대(對)백제 복수극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삼국 통일 전쟁이었다. 첫 상대는 백제였다. 백제가 망한 과정도 여느 망국사와 패턴이 같다. 명징했던 의자왕의 사치와 부패, 권력층의 이반 따위 현상이 부여 도성을 횡행했다. 의지할 곳은 이제 계백밖에 없었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환도산성과 고구려 고분군. 이미지 크게보기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환도산성과 고구려 고분군. 서기 3년 고구려 2대 유리왕이 만든 이성은 342년 전연(前燕) 모용황 군대에 의해 파괴됐다. 이후 고구려는 절치부심 끝에 군사 강국으로 거듭났지만 668년 멸망했다. 멸망 원인은 권력층 분열이었다.
660년 6월 출정 명령을 받은 계백은 병사 5000을 끌고 황산벌로 나갔다. 그가 지휘한 병사 5000은 삼국사기에 '死士(사사)'라고 기록돼 있다. '죽음을 각오한[決死]' 전사라는 뜻이다. 명을 받고 귀가한 계백은 먼저 아내와 자식을 모두 죽였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가족을 죽이고 집안을 피칠갑으로 만든 장수가 결사대 5000명을 데리고 벌판에 나가니, 거기에는 신라 결사대(決死隊)가 자그마치 5만 명이나 버티고 있었다. 백제는 지도부가 붕괴된 상태였고, 신라는 왕부터 소년병까지 결사항전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계백은 네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한 번은 졌다. 그 패전에서 계백은 힘이 다하여 죽었다.('삼국사기' 계백 열전) 의자왕은 야반도주했다.

힘이 다한 이유가 있었다. 신라 장군 김흠순은 "지금 죽으면 충성과 효도를 한 번에 다 한다"며 아들 반굴(盤屈)을 내보냈다. 전투에 뛰어든 반굴은 곧 전사했다. 김품일은 "열여섯 살인 네가 모범이 되라"며 아들 관장(官狀)을 내보냈다. 한 번 붙잡혔다 계백에 의해 돌려보내진 관장은 우물물 한 번 떠 마시고 또 가서 죽었다. 말안장에 매달려 돌아온 아들 목을 보며 아버지 김품일은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계백은 "신라와 대적 불가"라 내뱉었다.(660년 7월 9일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

엽기적이지 않은가. 그 장엄하되 전체주의적이고 엽기적인 상류층 희생 끝에 최약체 신라가 두 나라를 꺾은 것이다.

저질 정치꾼의 등장과 고구려 멸망

665년 연개소문이 죽었다. 천지사방이 전쟁터였고 민심은 이반된 상태였다. 연개소문 세 아들에게 모리배들이 접근했다. 어떤 사람이 두 동생에게 이리 일렀다. "(맏형) 남생이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하니 먼저 계책을 세우는 것만 못하다." 또 누군가가 남생에게 이리 말했다. "두 동생은 형이 돌아와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을 막고 들이지 않으려 한다."(666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5년) 모리배들 이간질에 '동생들은 금쪽같은 형의 아들들을 단번에 살육했다. 이에 남생이 격문을 보내니 동맹세력이 창을 들었다.'(연남생 묘지명, 서영교,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전쟁 와중에 권력이 그대로 분열됐다는 뜻이고, 그 분열 원인은 동생들 앞으로 줄을 섰던 '어떤 사람'들, 저질 정치 모리배들이었다. 모리배와 귀 얇고 판단력 혼미한 권력자 집단과, 엽기적일 정도로 똘똘 뭉친 노블레스들이 전쟁을 했다. 장남 연남생은 동맹 세력을 이끌고 당으로 귀순해 고구려 침략사령관이 되었다. 논리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결과는 뻔했다.

북에서는 '돌궐계 기병들이 고구려 군사를 양 떼처럼 몰고 다녔고', 남에서는 '나라 수호를 위해 신명을 돌보지 않는, 전사(戰死)를 명예로 여기는' 무사 정신에 의해 쫓겨다녔다.(서영교) 668년 고구려가 사라졌다.

당은 신라를 노리며 철수를 거부하다가 699년 9월 군사를 빼 서쪽 토번과 전쟁을 개시했다. 공백을 본 신라는 이듬해 3월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를 공격했다. 735년 당은 신라에 평양 이남 땅을 공식 인정했다. 평화가 왔다. 그 평화를 지킨 청년들이 충청도 깊은 산중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들이 정랑이고 오랑이며 금랑이다. 나라 경영법을 알고 있던 이름들이다.


조선일보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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