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따라 기술도 탈출… 통제불능 原電생태계

최현묵 기자 안준호 기자 최인준 기자
입력 2019.06.19 01:25 수정 2019.06.19 01:31

탈원전 2년만에 관리시스템 붕괴
유출된 핵심기술 '냅스' 놓고도 한수원·원안위 종일 서로 딴소리

한국형 원전(原電)의 설계도 등 핵심 기술 해외 유출 의혹에 대해 국가정보원 수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세계 최고 경쟁력을 지닌 우리 원전 기술과 인력에 대한 관리가 통제 불능 상태인 것으로 드러났다. 급격한 탈(脫)원전 정책으로 미래가 불안해진 원전 핵심 인력이 대거 해외로 이탈하고, 이에 따라 기술 유출 위험도 커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18일 원전 운영 기업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원자력 감독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는 유출 의혹을 받는 핵심 기술인 '냅스(NAPS·원자력응용프로그램)'가 전략물자인지에 대해서조차 온종일 전혀 다른 소리를 내놨다. 전략물자로 지정되면 수출 때마다 정부 기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17일 밤 기술 유출 의혹이 불거지자 한수원과 원안위는 모두 "냅스가 전략물자"라고 했다. 하지만 18일 오전 한수원은 해명 자료를 통해 "2018년 (원안위 산하인) 원자력통제기술원은 냅스 프로그램을 '비전략물자'로 판정한 바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날 오후 원자력통제기술원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냅스는 전략물자가 맞는다"고 했다. 냅스는 한전기술이 20여 년간 개발한 소프트웨어로, 원자로에 이상이 발생했을 때 경고하는 첨단 프로그램이다.

응용프로그램인 냅스보다 훨씬 중요한 원전 설계도 자체가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도 국정원이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한국형 원전 설계도가 통째로 유출될 가능성은 작다"면서도 "만약 설계도 일부라도 유출됐다면 향후 한국형 원전 수출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 탈(脫)원전 정책이 2년간 지속되는 동안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춘 한국 원전산업의 핵심 기술과 인력이 유출되는 것을 사실상 방조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탈원전으로 국내 인력들이 해외 기업으로 취업하는 경우가 크게 늘면서 기술의 동반 유출 우려가 커졌음에도 정부가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한수원 퇴직자의 경우, 국내 기업에 취업할 땐 공직자윤리법에 준해 3년간 취업 제한을 받지만, 정작 해외 기업에 취업할 땐 전혀 제한을 받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는 "기술 유출 가능성이 심각한 해외 취업에 대해 사실상 수수방관하는 정부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핵심 인력과 함께 기술마저 유출되는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유출 의혹이 제기된 기술 중 '냅스' 소프트웨어는 4년 사이에 '전략물자'→'비전략물자'→'전략물자'로 위상이 변했다. 냅스는 2015년 한수원이 아랍에미리트(UAE)에, 2018년 한국전력기술이 미국에 각각 수출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수출에서 냅스는 한 번은 전략물자, 한 번은 비전략물자였다. 같은 중요 기술 제품에 대한 평가가 상이했던 것인데 이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는 곳은 없다.

원안위 산하 원자력통제기술원은 2015년 '냅스'를 전략물자로 판정했다. 당시 한수원은 냅스를 UAE 원자력공사(ENEC)에 수출하기 위해 통제기술원의 수출 허가를 받은 뒤 원안위 심사를 거쳐 수출했다. 하지만 2018년 말, 한전기술은 UAE 원전 시뮬레이터 업그레이드 목적으로 냅스 프로그램 전체를 미국 WSC에 수출하면서 같은 수출 허가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이때 통제기술원은 냅스를 '비전략물자'라고 판정했다. 문제는 이때의 냅스가 2015년 당시보다 업그레이드됐고, 12개 프로그램 중 9개만 넘겼던 2015년과 달리 다 넘겼다는 점이다.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는 "냅스의 소스 코드(소프트웨어의 설계도)가 넘어갔다면 설계 중요 정보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전략물자 해제 이유는 못 밝혀"

통제기술원 측은 "2015년과 2018년에 다르게 판정을 내린 것은 맞는다"면서도 "판정이 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원전 핵심 기술이 전략물자와 비전략물자를 오간 이유를 '미스터리'로 남겨놓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UAE와 외교적 갈등이 빚어지면서 UAE 달래기용으로 이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이명박 정부 때 맺은 한·UAE 군사 MOU 변경 문제로 외교 갈등이 커지자, 정부는 2017년 12월 임종석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UAE 특사로 파견했고, UAE는 이듬해 1월 무함마드 왕세제의 핵심 측근인 칼둔 청장을 한국에 보낸 바 있다.

원전 기술 유출 의혹이 터진 후 정부 부처들은 책임 떠넘기기에 바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18일 "전략물자 지정은 원안위 산하 원자력통제기술원에서 판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원안위는 "원안위는 핵물질, 원전 운영 핵심 물자, 기술 수출을 담당하고, 원전에 들어가는 제품과 부수적 기술은 산업부가 수출을 통제한다"고 반박했다.

탈원전 2년 만에 기술·인력 유출 심각

이번 원전 기술 유출 의혹에서 불거진 또 다른 문제점은 원전 인력의 해외 유출 문제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2년 만에 국내 원전 관련 전문 인력의 엑소더스(대탈출)는 심각하다. 지난 한 해 동안 한수원, 한전기술, 한전KPS 등 원자력 관련 공기업 3사의 자발적 퇴사 인원은 144명이다. 탈원전 이전인 2015년엔 78명에 불과했다.

반면 후쿠시마 사고 이후 탈원전 정책으로 산업 생태계가 무너진 일본은 최근 뒤늦게 인재 육성과 기술 확보에 나섰다. 탈원전 이후 일본은 원전 해체 산업으로 눈을 돌렸지만 전문 인력 이탈은 이미 빠르게 진행됐다. 일본 정부는 최근 관계 부처와 산·학 관계자가 정기적으로 원자력 인재 육성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회의체인 '관계부처 합동회의'(가칭)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경제산업성, 문부과학성 등 관계 부처 외에 원전업계 관계자와 원자력 전문가 등이 참여할 이 회의체는 업계 단체와도 협력 체제를 구축할 계획이다.


☞'전략물자'와 '비전략물자'

정부가 국가 외교·안보상 이유로 수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지정한 제품과 기술을 말한다. 산업자원통산부 장관이 정한 '전략물자 수출입고시'에 따라 전략물자가 지정된다. 비전략물자로 판정되면 정부 허가가 없어도 수출입이 가능하다.


조선일보 A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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