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만 좇는 정치가여, 멈춰서 사유하라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입력 2019.06.15 03:00

정치는 없고 권력욕만 있는 지금 '정치적 자유'의 가능성 탐색하고 전체주의 경계한 아렌트 주목

정신의 삶:사유와 의지|한나 아렌트 지음|홍원표 옮김|푸른숲|744쪽|3만9800원

정치가 실종되고 있다. 정치를 단순한 권력투쟁이나 복지행정으로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정치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권력욕에 눈이 먼 정치꾼들은 흘러넘치는데 진정한 국가정치인은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과열돼 팽창하는 정치적 담론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정치를 필요로 하는가? 정치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물음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정치의 실종'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를 호출한다. 세계에서 정치가 완전히 소멸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커다란 위험은 없다고 단언한 한나 아렌트의 이름은 이제 그녀가 평생 동안 철저하게 사유한 문제를 대변한다. "정치의 의미는 자유다."

전체주의 정권이 몰락한 이후 자유민주주의가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한 역사적 전환기에 아렌트의 이름이 다시 호명되고 그녀의 사상은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왜 아렌트인가?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정치화한 전체주의가 인간의 실존 조건인 자유의 싹을 완전히 없앨 수 없었다면, 자유민주주의가 자유의 실현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43세 때인 1949년 무렵의 한나 아렌트.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아렌트는 통상적 의미의 좌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범주적 구별을 거부하고 정치적 자유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전체주의의 해결책은 전체주의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강한 유혹의 형태로 생존할 것"이라는 아렌트의 경고는 여전히 타당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강력한 유혹으로 작용하는 전체주의적 경향에 저항할 때에만 정치적 자유는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전체주의적 경향을 경계할 수 있는가?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지켜보면서 괴물 같은 악을 저지른 자가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다. 인류에 대해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지른 전체주의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유의 무능력' '사유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과 정치가 만난다. 아렌트는 사유, 의지, 판단과 같은 순수한 철학적 문제를 다룰 때도 항상 '정치적 자유'를 염두에 두고, 혁명 또는 폭력과 같이 철저하게 정치적 현상과 문제를 이해하고자 할 때도 철학적 사유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렌트의 가장 철학적인 저서로 평가받는 '정신의 삶'이 그 증거이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칸트의 3비판서처럼 철학의 핵심 문제인 '사유' '의지' 그리고 '판단'으로 나타나는 정신의 세 가지 기본 활동을 서술하려는 의도로 태어났다. 1975년 12월 4일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기 전 '의지' 원고를 마무리했지만, 사후 타자기 위에서 발견된 종이에는 '판단'이란 제목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판단' 부분이 비어 있고 열려 있는 것처럼 '사유'와 '의지'로 구성된 이 책을 굳이 사상의 체계로 읽을 필요는 없다.

아렌트가 이 책을 쓴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다. 전체주의를 온몸으로 겪은 아렌트를 괴롭히는 의문은 간단하다. 사유의 부재가 전체주의를 가져온다는 '악의 평범성'을 고려한다면, 생각하는 능력이 악행에 맞설 수 있는 실제적 조건이 될 수 있는가? "우연히 발생하거나 관심을 끄는 모든 것을 결과에 관계없이 검토하는 습관, 즉 사유하는 그 자체는 악행을 자제하도록 하는 조건들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전체주의를 경계하는 데 필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의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

이 책의 처음과 끝은 아렌트의 동기를 선명히 보여준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로 책은 시작한다. "사유는 과학과 같이 지식을 주지 않는다. 사유는 유용한 실천적 지혜를 낳지 않는다. 사유는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지 않는다. 사유는 우리에게 행동할 힘을 직접 부여하지 않는다." 유용한 지식과 실천적 지혜를 제공하지 않는 생각이 어떻게 전체주의를 예방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의 끝은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언급하며 인간의 자유는 판단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고 암시한다.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무엇이 오늘날 우리를 사유할 수 없도록 만드는지 묻는다. 매일매일 해결해야 할 일에 쫓겨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따른다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렌트는 "멈춰서 사유할(stop and think)" 여유를 강조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습관을 중단하고,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이런 사유의 결실은 "옳음과 그름을 말하는 능력"이다. 아렌트는 이 판단 능력만이 인간의 정신 능력 가운데 가장 정치적인 능력이라고 말한다.

생각 없이 던져진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 아렌트의 말이 경종을 울린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 정신은 죽은 상태인 것처럼" 생각 없는 정치는 죽은 정치다. '정신의 삶'이 훌륭하게 완역되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이 책이 반가운 이유이다.



조선일보 A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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