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이장과 통장

이동훈 논설위원
입력 2019.06.15 03:16
경기 농촌 지역구 A 의원의 하루 일정표에는 생일 맞은 이장에게 전화하는 계획이 늘 올라가 있다. 지역구에 이장이 800여 명 있다 보니 하루에 두세 명에게 "생신 축하한다"는 전화를 돌리기도 한다. 대전 지역 B 의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역구로 달려가 참석하는 행사가 있다. 지역구 통장 단합 대회다. 최근 만난 야당 소속 서울 지역 C 의원은 정권 교체 후 통장들마저 친여 성향으로 교체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선거법상 이·통장은 선거운동을 못 한다. 그렇다고 영향력까지 없어진 건 아닌 모양이다. 고무신이나 돈 봉투 돌리던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이·통장은 선거에서 여전히 중요하다고 의원들은 입을 모은다.

▶전국 이·통장은 9만5000여 명, 도시 통장이 6만여 명이고 촌 이장이 3만여 명이다. 통장보다 이장의 선거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한다. 선거를 앞두고 시골 노인들이 "이번에 누굴 찍어야 돼?" 하고 물어보는 대상은 식구 다음으로 마을 이장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장은 선거 날 마을 방송으로 투표를 독려하고, 투표장으로 노인들을 실어 나르기도 한다. 선거운동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아파트가 들어차고 젊은 층이 많은 도시 통장은 별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의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통장은 사람 만나는 게 일이다. 주민 서명을 받거나 행정기관 복지 수요를 조사한다. 구전(口傳) 홍보력이 만만치 않다. "김 의원이 우리 동네로선 훨씬 낫다" "이 후보는 문제가 많던데" 식의 얘기가 오간다. 막강한 여론 주도층이다. 의원들이 동별 통친회(통장 친목회) 행사를 꼭 챙기는 이유다.

▶이·통장의 공식 등장은 1961년부터다. '행정동·리 하부 조직을 시·군 조례에 따라 둘 수 있다'는 지방자치법이 근거인데 정작 법에는 '통장' '이장' 명칭이 없다. 처우는 한 달 수당 20만원과 명절 상여금 200%, 월2회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면 수당 2만원을 지급한다고 한다. 15년째 동결이라 처우 개선이 이·통장들 숙원이었다고 한다.

▶민주당과 정부가 이·통장 수당을 30만원으로 올리는 등 처우 개선에 나서기로 하자 한국당이 발끈했다. 20대 국회 들어 이·통장 처우 개선 법안을 내고 적극적으로 움직인 쪽은 한국당이었다. 그런데 작년 예산 심의 때 정부가 그 법안을 비토했다. 야당으로선 여당이 법안을 가로채 총선용 선심 쓰기에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여당은 "야당이 국회 등원 안 하니 처리한 것뿐"이라고 했다. 선거가 다가오긴 다가온 모양이다.


조선일보 A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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