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믹서기 사는데 쓴 교육부의 '눈먼 돈'

박세미 사회정책부 기자
입력 2019.06.12 03:01
박세미 사회정책부 기자
믹서기 3대(90만원), 북 토크쇼(1500만원), 주민 영화제(200만원), 정책 소풍(4500만원)…. 교육부가 지난해 시작한 국책 사업인 '풀뿌리 교육자치 사업'에 공모한 지자체들 사업 신청 내역이다. 한 지자체는 대당 30만원씩 하는 믹서기를 학교 3곳에 비치해 생태 교육에 쓰겠다고 했다. 믹서기 구입이 '풀뿌리 교육자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른 지자체는 '청춘 북 토크쇼'를 열겠다며 1500만원을 쓰겠다고 적어냈고, 또 다른 지자체는 '주민 영화제'를 여는 데 200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수 혁신교육 사례를 찾아 연구하는 '정책 소풍'에 4500만원을 책정한 지자체도 있었다.'북 토크쇼'에 출연하는 강사에게 강연료를 얼마나 줄지, 주민 영화제는 어떻게 운영할 건지, 정책 소풍의 일정은 얼마큼 알차게 짰는지 지자체가 낸 사업 계획서만으로 솔직히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이들은 모두 교육부의 사업 공모에 선정됐다.

방송인 김제동씨의 90분 특강에 강연료 1550만원을 주려다 취소한 대전 대덕구청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제동씨가 특강 하면 일반 강사보다 훨씬 많은 구민이 관심을 가질 것 아니겠어요. 강연료가 비싸다는 데만 비난 여론이 쏠려 아쉬워요." 그러면서도 "김제동씨 강연 주제는 무엇이었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 관계자는 "구체적인 건 잘 모르겠다. 베테랑이니 알아서 잘 준비하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대덕구청은 지난해 풀뿌리 교육자치 사업을 신청하면서 혁신교육지원센터 구성, 역사·문화 탐방 교실 운영 등 9가지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1년 예산(1억5500만원)의 10%에 해당하는 돈을 김제동씨 강연료에 몰아주려고 했다. 그러면 다른 사업들은 쪼그라들거나 없어질 것이 뻔하다. 구청도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대덕구청이 무리수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교육부 '풀뿌리 교육자치 사업' 자체가 예산을 헤프게 써도 딱히 제재하기 힘들 정도로 목적과 내용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교육부 설명을 들어보면 풀뿌리 교육자치 사업엔 마을 결합형 학교, 학교와 지역사회의 협력 같은 듣기 좋은 말이 가득 들어 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구체화할지, 아이들에게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 물으면 돈을 준 교육부도, 돈을 받은 구청도 제대로 답을 못한다. 이렇게 한 해 수십억원의 예산이 눈먼 돈으로 뿌려지고 있다. 이쯤 되면 대덕구청이 "김제동씨 강연료가 왜 논란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유를 알 듯하다.


조선일보 A16면
베르나르 뷔페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