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합 맞춘 지금, 음악을 가장 잘하는 순간"

김수경 기자
입력 2019.06.12 03:01

[시나위·부활과 80년대 록 이끈 블랙홀]
내달 초 14년만에 정규 9집 발매… 매달 첫 토요일엔 단독 콘서트도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옷을 입고 긴 머리를 찰랑이는 중년 남자 넷이 더운 날씨에 보도를 뛰어오르자 행인들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몇은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자꾸 엉킨다"고 투덜댔고, 몇은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불평했다.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은 록 밴드 '블랙홀'. 시나위, 부활, 백두산과 함께 1980~90년대 대한민국 록 시장을 사로잡은 파워 메탈 밴드인 이들은 내달 초 정규 9집 앨범을 발매한다. 8집(2005년)을 낸 지 14년 만. 해체나 휴지기 없이 30년을 쉬지 않고 달려온 불굴의 밴드다. 조일동 대중음악평론가는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는 시나위나 백두산보다 부활의 '희야'와 블랙홀의 '깊은 밤의 서정곡'이 압도적으로 인기가 많았다"며 "시적인 가사와 날카롭고 정교한 파워 메탈 스타일은 블랙홀만이 만들 수 있는 음악"이라고 했다.

공백 없이 데뷔 30주년을 맞은 밴드 블랙홀.이미지 크게보기
공백 없이 데뷔 30주년을 맞은 밴드 블랙홀. 왼쪽부터 기타 이원재, 드러머 이관욱, 보컬 주상균, 베이스 정병희. 펄쩍펄쩍 뛰던 이들은 "메탈 밴드가 너무 발랄한 거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장련성 객원기자
지난 5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한국 메탈계의 큰형님'들을 만났다.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리더 주상균(57)이 "다들 같이 늙어가니 나이 드는 줄 몰랐다. 30주년이라는 것도 작년에 팬들이 알려줘서 알았다"고 해 폭소가 터졌다. 기타 이원재(50)가 "아직도 철이 없는 거죠, 뭐"라며 깔깔댔다.

베이스 정병희(55)가 긴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메탈 음악 하면 오토바이 타고 다니고 마약 하고 그럴 줄 아는데 우린 욕도 안 한다." 막내인 드러머 이관욱(44)이 "우린 싸우지도 않고 같이 술도 안 마신다. 사진 찍을 때 일부러 인상 한번 팍 쓸 뿐"이라고 해서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9집까지 달려온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989년 첫 앨범의 타이틀곡 '깊은 밤의 서정곡'이 큰 인기를 끌었지만 대형 기획사와 함께한 3집 앨범은 판매량이 저조했고 해체 위기도 맞았다. 8집 앨범을 내기까지 멤버도 몇 차례 바뀌었다. 밴드 안팎에서 끊임없이 잡음이 생겼지만 블랙홀은 음악을 흡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블랙홀 헌정 앨범도 올해 중 발매된다. 헌정 앨범은 히트곡만 모은 베스트 앨범을 만드는 게 일반적인데, 이번 앨범은 1989년 발매한 블랙홀 1집 곡들로만 채워진다. 어비스, 매써드, 바세린 같은 후배 록 밴드들이 자신만의 색깔로 리메이크했다. 헌정 앨범인 만큼 온라인에서 팬들로부터 제작비를 모금했다. 블랙홀의 인기를 증명하듯 목표 모금액을 훌쩍 넘은 금액이 모였다.

30년이 지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네 사람은 '흰머리'와 '가족'을 꼽았다. 정병희와 이원재는 "처음 염색할 때 엄청난 자괴감이 들었다"면서도 "지금은 공연 전 미용실에 가서 스트레이트 펌을 하고 검은색으로 염색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워졌다"고 했다. 스무 살·스물한 살 아들을 둔 주상균은 "결혼 생활과 밴드를 병행하는 건 그 어떤 음악보다 더 어려웠다"면서도 "공연 끝나고 아이들이 무거운 짐을 들어줄 때 보람 있다"고 했다.

30주년을 기념해 블랙홀은 지난 1일부터 매달 첫 번째 토요일마다 서울 플랫폼 창동 61 레드박스 등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주상균은 "무슨 곡을 연주할지 사전에 이야기하지 않아도 누가 한 소절만 연주하면 곧바로 합주가 된다"며 "30년간 매주 최소 2번씩 만나서 연주했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했다.

30년쯤 됐으면 연습 따윈 안 해도 무대에 설 수 있지 않을까. "'나이와 상관없이 뮤지션으로서 가치가 떨어졌을 때 그만두자'고 이야기해요. '우리 오래했어요, 그러니까 좀 봐주세요' 그러면서 살고 싶진 않아요.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어요. 30년간 합을 맞추면서 연주해 온 지금, 가장 음악을 잘하니까요."


조선일보 A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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