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고해성사'까지 털어가나

이명진 논설위원
입력 2019.06.12 03:15

잇따르는 '로펌 압수수색'에 변협이 피해 실태 조사 나서
방어권 무너뜨리는 검찰이 변호사 制度 기반마저 흔든다

이명진 논설위원
얼마 전 대한변호사협회가 회원 대상으로 '피해 실태 조사'를 벌였다. 2만2000명 전체 변호사에게 공문을 보내 '압수수색 당한 적 있느냐'고 물었다. 공문은 '조사 취지'를 이렇게 적고 있다. '검찰·경찰을 비롯한 권력기관들이 로펌과 기업 법무팀, 개업 변호사의 사무실·컴퓨터·휴대전화를 압수수색해 법률 상담을 증거 자료로 수집함으로써 피의자 방어권과 변호사의 비밀유지권을 침해하고 있음. 이에 피해 실태, 사례를 조사함.'

이런 식 실태 조사는 변협 창립 67년 만에 처음이다. 그만큼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요즘 변호사들은 자료를 주고받을 때 텔레그램 같은 보안 메신저를 쓰고, 주기적으로 컴퓨터·휴대전화 데이터도 '청소'한다. 로펌이 기업과 회의하면서 자료 대신 구두로 설명하는 일도 잦다고 한다. 검찰에 털리기 전에 알아서 조심하자는 것이다. 곳곳이 '자료 보안' 비상이다.

이 소동과 논란은 2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기업 비자금을 수사하던 검찰이 탈세 수사로 방향을 틀어 조세 분야 자문 로펌에 압수영장을 들이밀었다. "반칙이다." "고해성사까지 털어갈 거냐."… 변호사들이 발끈했으나 그때만 해도 '설마 또 그러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작년과 올해 법원행정처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건 수사에서도 로펌이 잇따라 압수수색을 당하면서 이 문제가 변호사업계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으로 대두했다. 법원 사건에선 검찰이 '재판 거래' 증거를 찾는다며 피의자도 아닌 변호사를 뒤졌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기업 압수수색에서 원하는 증거를 찾지 못하자 로펌이 법률 자문 목적으로 보관하던 기업 내부 자료를 털어간 경우다. 그 뒤로도 압수수색 당한 로펌이 더 있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변호사가 '범죄'에 가담한 것도 아닌데, 오로지 검찰의 수사 편의를 위한 압수수색이 남발되고 있다.

수사에 성역이 있을 수 없다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線)도 있다. 이를테면 가톨릭 신부에게 도둑이 고해성사하면서 죄를 고백했다고 해서 수사기관이 신부를 조사하거나 성당을 압수수색하지는 않는다. 범죄 수사가 추구하는 '정의' 못지않게 소중한 가치인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어서다. '의뢰인의 비밀 보호' 역시 변호사뿐 아니라 국민의 재판청구권과 '변호인 도움을 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가치다. 의뢰인 비밀을 누설한 변호사를 처벌하면서 동시에 압수수색 예외를 인정하는 방식 등으로 변호사에게 비밀 유지 특권을 부여한 나라도 많다. 그런데 우리 검찰은 이마저 무시하고 있다.

법원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전직 대법원장이 재판에 나와 "나에게는 호미 자루 하나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방어권이 무력화됐다는 탄식이다. 최근 만난 검찰 출신 변호사는 "검사들이 답을 정해놓고 수사한다"고 한숨지었다. 피의자나 변호인 말은 들은 척 않고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다. 요즘 검찰은 압수수색·체포·구속 같은 제도적 권한을 남용해 무리한 수사 프레임을 짜고, 언론플레이 등 비(非)제도적 권한을 휘둘러 재판마저 조종하려 든다. "검찰이 수사가 아니라 재판의 주재자(主宰者)가 되려 한다"고 변호사들이 말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검찰의 변호인 압수수색이 계속된다면 피의자 방어권은 말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변호사 제도의 존립 기반까지 흔들릴 수 있다. 국회가 법을 만들어 변호사·의뢰인 간 의사 교환 내용, 법률 자문 자료 등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공개 요구나 증거 사용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A35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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