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국 편, 중국 편에 앞서 '기업 편'부터 돼야

입력 2019.06.12 03:20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 IT 기업들에 대해 "그들이 우리(미국 기업)보다 더 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화웨이를 "위협으로 본다"면서 "나는 5G(차세대 이동통신)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젠 우리가 곧 (5G 시장을) 선도할 것이다"라고도 했다. 미국 기업이 중국 등과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라는 것이다. 정부 힘으로 경쟁국 기업의 싹을 말리고 자국 산업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미·중의 패권 충돌은 특정 기업의 생사를 둘러싼 정부 간 대리전이란 초유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미국은 실리콘밸리의 경쟁자로 부상한 화웨이를 죽이려 하고, 중국 정부는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전 세계가 '화웨이냐, 아니냐'를 강요받는 신(新)냉전이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까지 두 강대국이 화웨이 문제에 목을 매는 것은 핵심 기업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방직 기술이 영국을 패권국으로 만들었듯이, 신기술을 주도하는 나라가 미래 산업은 물론 안보·군사 분야의 패권까지 장악하게 된다. 산업 기술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핵심 자원이고, 기술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기업이다. 미국이 중국 첨단 산업 견제에 나서고, 중국이 총력전으로 맞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국 산업과 기업 지키기에 정부가 나서는 것은 미·중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다. 그런 흐름에서 벗어난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 화웨이 사태가 "개별 기업 문제"라는 청와대의 입장 표명이 산업계를 경악시켰다. 지금 한국의 IT 기업들은 미·중 양쪽으로부터 자기편에 설 것을 노골적으로 강요받고 있다. 자칫 개별 기업은 물론 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런데 정부는 기업들이 알아서 하라고 한다.

현 정부의 기업 정책은 자국 기업 보호와 육성이 아니라 기업 목줄을 죄는 반(反)기업에 가깝다. 세계 수준에 오른 몇 안 되는 한국 기업인 삼성전자는 2년 넘게 검찰 수사와 끊임없는 압수 수색을 당하고 있다. 해외 경쟁사들이 활발한 인수·투자로 성장 동력을 키워가는데 삼성의 인수·합병은 2년 이상 전면 중단됐다. 검찰은 확정되지 않은 삼성의 혐의 사실을 끊임없이 외부에 흘리고 있다. 고용부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기밀 정보를 공개하겠다고도 했다. 삼성전자는 한국 수출의 24%, 법인세수의 16%를 담당하고 특허 출원 세계 6위인 한국의 대표 기업이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해야 할 핵심 기업을 정부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못 잡아서 안달이다.

세계 5위 철강사 포스코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가혹한 환경 규제 때문에 '10일 조업 정지'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고로(高爐)를 닷새만 멈추면 복구에 석 달 이상 걸려 글로벌 경쟁에서 타격을 입게 된다. 세계 모든 나라 철강사들이 하고 있는 고로 밸브 개방에 대해 한국 정부와 지자체만 문제 삼고 있다. 조선 세계 1위 현대중공업과 2위 대우조선의 합병은 민노총의 실사(實査) 방해로 난항을 겪고 있다. 한국 조선업을 살릴 회생안이 방해받는데도 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주 52시간 규제는 기업 연구원들이 밤샘 작업을 못하게 사무실에서 내쫓는 코미디를 낳고 있다. 산업 안전 검사를 이유로 24시간 가동돼야 할 화학·반도체 공장을 멈춰 세우게 할 화학물질관리법도 곧 시행된다. 정부가 앞장서 기업 경쟁력을 떨어트리고 있다.

국내에선 대기업이라도 세계시장에 나가면 초거대 기업들과 사활을 걸고 경쟁하는 일개 기업일 뿐이다. 대표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지면 경제도 국력도 쪼그라든다. 미국 편이냐, 중국 편이냐에 앞서 기업 편부터 들어야 한다.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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