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안방' 뒤흔든 BTS 무대 뒤엔 그녀가 있었다

런던=최보윤 기자
입력 2019.06.12 03:01

'갓 탤런트'서 BTS 무대 만든 김내진

지난달 30일 영국 ITV 채널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인 '브리튼스 갓 탤런트(BGT)' 준결승 생방송 무대. 핑크빛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서 등장한 방탄소년단(BTS)을 향해 폭발적인 함성이 쏟아졌다. 파스텔톤 슈트를 입은 BTS가 혼신을 다하는 무대 뒤로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부터 석양, 찬란한 태양 등 몽환적인 장면이 흘렀다. 독설가로 유명한 심사위원 사이먼 코웰이 기립 박수를 보내자 무대는 또 한 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팝스타의 성지(聖地)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을 이틀 앞두고 펼쳐진 화끈한 '전초전'이었다.

지난달 30일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출연한 방탄소년단. 파스텔톤 슈트를 입은 BTS 멤버들 뒤로 보이는 핑크빛 가로등과 화려한 색감의 무대가 김내진씨 작품이다. /김내진 미술감독 제공
영국 팬들을 녹여버린 BTS 무대의 성공 뒤엔 또 다른 한국인이 있었다. 영국 TV 쇼 전문 무대 미술감독 김내진(46)씨다. "뿌듯하고, 고맙죠. 여기는 열광적으로 소리 지르고 환호하는 팬 문화가 드문데, 무대 안팎에서 거리를 들썩들썩하게 하는 응원을 들으니 전율이 느껴졌어요. 제작진도 'BTS가 이 정도였느냐. 대단하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지요."

김 감독도 방탄소년단 무대를 만들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다. 2015년 BGT 결승 무대까지 담당한 적은 있지만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다른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인 ITV의 'X 팩터'와 BBC의 '더 보이스', 오케스트라 경연 프로그램인 '올 투게더 나우(BBC)' 등의 무대 미술을 총괄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유럽 최대 음악 축제인 '유로 비전 송 콘테스트' 무대를 맡았다. "마침 잘 알고 있던 음반사 관계자가 'BTS 무대가 있다'며 연락해왔어요. 당연히 '예스(Yes)'였죠." 그녀에게 주어진 건 약 2주. 동선 체크 때문에 뮤직비디오를 수십 번도 더 돌려 봤다. TV 무대는 카메라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라 작은 공간을 최대한 넓어 보일 수 있게 깊이감을 극대화하면서도 춤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동화 같은 느낌을 살리려 가로등을 세우기로 했고, 런던 전역으로 발품을 팔아 찾아낸 가로등에 일일이 색칠했다.

김내진 감독(위)과 최근 그가 연출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한 장면. /김내진 미술감독제공
영국 최고의 쇼 프로그램 무대를 전담하다시피 하는 그는 원래 연극학도였다. 중앙대 연극과를 2년 다니다 무대 미술에 푹 빠져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무대디자인을 전공했다. "'셰익스피어의 나라'에서 연극의 심장부를 건드린다는 쾌감은 있었지만, 동시에 한계도 존재했지요. 실험적인 것을 시도하기에도 고전 무대는 제게 너무 어려웠어요."

미련은 버리라고 있는 것! TV 무대로 눈을 돌렸고, 킹스턴대에서 TV·영화 무대 석사과정을 마쳤다. 2004년 ITV의 '폴 오그레이디 쇼'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무대를 익혔다. "오디션 생방송 프로그램을 맡다 보면 마감이 주는 압박이 희열로 돌아와요. 누가 탈락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주일 안에 공허한 세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같은 마법 아닌 마법을 부리게 되지요." 프로를 맡는 동안 팝가수 존 레전드, 비욘세, 블랙아이드피스, 카일리 미노그 등 대형 스타들의 무대를 꾸미며 자신감을 얻었다.

프리랜서라 '다음 주엔 일이 들어올까?' 걱정한 적도 많다. 하지만 다채로운 색감의 조형물과 여백의 미, 절제된 선과 환상적인 영상미를 주무기로 한 그의 무대에 관객들은 박수를 보냈다. "2013년쯤 영국 최고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인 'X팩터' 측에서 전화가 오는 순간 깨달았죠. 이제 끼니 걱정은 끝났구나, 하하!"

그는 BTS를 멀리서만 바라봤다고 했다. '스타 모시기'에 영국 측 경호가 상당했다고 한다. "대신 함께 꾸민 화면이 영원히 남잖아요. 팝 문화의 한복판에서 한국인이 만든 무대에 한국인이 오른 장면을 보게 된 날이 왔다는 것만 해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조선일보 A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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