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고고학은 같다, 숨겨진 걸 발굴하니까"

로마=최보윤 기자
입력 2019.06.10 03:00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제2의 전성기 만든 총괄 디자이너
이탈리아서 '2020 크루즈컬렉션' 선봬

알레산드로 미켈레
조명 꺼진 어두컴컴한 미술관에 도열한 로마시대 조각상들은 마치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움직일 것만 같다. 웅장한 청동상 뒤로 시간을 중세로 되돌린 듯한 프레스코화가 벽면을 메운다.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미술관으로 꼽히는 이탈리아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 '구찌 2020 크루즈컬렉션'을 보러 온 관객들은 마치 동굴 탐험을 하는 듯 작은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발길을 옮겼다. 구찌의 열성팬인 가수 엘턴 존과 할리우드 배우 시어셔 로넌, 셀마 헤이엑 같은 스타도 보였다.

"내 일은 가끔 고고학자의 업(業) 같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걸 발견해 내려 하니까요. 이 의상 중에서 당신이 좀 더 탐구하고 싶은 것, 더욱 확인하고 싶은 부분에 심도 있게 조명을 밝혀 보는 겁니다."

로마식 튜닉부터 현대의 미키마우스 의상 등 아흔일곱 벌의 패션쇼가 끝난 뒤 구찌 총괄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47·작은 사진)를 만났다. 그를 마주한 몇몇은 "마치 동굴 속에서 걸어나오는 예수 같다"며 웅성댔다. 2000년대 들어 쇠락해져 간 '구찌 왕국'을 단번에 부활시킨 주역이니 '구원자'란 별명이 어색하지 않다. 12년간 구찌의 '평범해 보이는' 직원에서 2015년 '유일한' 자리에 발탁된 미켈레 자체가 어둠 속에서 발견한 '빛'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려고 입 주변을 까맣게 칠하고 '구찌'를 새겨놓은 '2020 크루즈 컬렉션'(왼쪽). 오른쪽 컬렉션은 고대 여신을 연상케 하는 드레스 위에 여성의 자궁을 자수 등을 이용해 꽃같이 표현했다. /구찌
비범(非凡)은 찰나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발현된다. 무대 의상같이 과장된 스타일이나 할머니 옷장에서 꺼낸 듯한 빈티지를 즐기는 '맥시멀리스트'의 출현은 팬들을 들끓게 했다. 매년 두 자릿수 이상의 폭발적 성장으로 그간 굳건했던 루이비통 아성을 뒤흔들 정도가 됐다.

'천재 디자이너'를 키운 배경을 궁금해하던 이들에게 미켈레는 이날 영감의 원천을 공개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놀이터였다는 공공미술관. 예술은 특정 계급만 즐기는 게 아니라, 대중이 누려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창구이자 안식처다. "축구장, 놀이공원 그런 건 흥미 없었죠. 박물관 가는 날만 기다릴 정도로 고고학에 매료됐어요. 고대 로마에 대한 '상사병'엔 치료약도 없더군요. 이번 쇼 장소인 내 고향 로마는 고대와 나를 연결할 통로이자, 작은 수퍼마켓 기둥에서조차 예술적 분위기에 빠져들게 하는 마성의 공간입니다."

패션쇼 전체가 거대한 메타포(은유)였다. 이날 그가 소재로 택한 어둠과 손전등은, 결국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미켈레 자신의 발언권을 대신하는 도구. 그는 드레스 한복판에 여성의 자궁을 마치 피어난 꽃처럼 수놓거나, 1970년대 페미니스트 슬로건이었던 '마이 보디 마이 초이스(My body My choice)'를 재킷 뒤에 새겨 놓기도 했다. 2013년부터 여성 권익 보호를 위한 구찌의 '차임 포 체인지(CHIME FOR CHANGE)' 로고를 단 티셔츠도 눈에 띄었다.

미켈레는 "모델 입술을 까맣게 칠한 것은 '자기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가끔, 세상 일에 숨 막힐 것 같을 때 난 패션을 통해 자유를 얻습니다. 패션을 만든다는 건, 자유에 대해 세상에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이니까요."


조선일보 A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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