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함흥냉면만 귀족인가… 들기름 살살 뿌려 비벼 먹는 비빔냉면의 신세계

정동현
입력 2019.06.08 03:00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비빔냉면편
서울 서초동 '서관면옥'

서울 서초동 '서관면옥'은 새로 떠오르는 냉면 명가 중 하나다. 빨간 양념의 비빔냉면(가운데)도 좋지만 깻가루와 김을 올리고 들기름을 뿌려 먹는 골동냉면(아래)을 반드시 먹어봐야 한다. 거드름 떨지 않고 다정하고 사분거리는 익숙한 맛이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음식에도 알게 모르게 등급과 계급이 있다. 예를 들어 달고 매운 일반 떡볶이보다 간장으로 간을 한 궁중 떡볶이가 더 위에 있다는 식이다. 그중 대표는 평양냉면이다. 담백하고 거의 무미(無味)한 복어를 최고라고 쳤던 일본의 도예가 기타오지 로산진처럼 한국에서는 자고로 평양냉면을 알아야 ‘음식 좀 먹을 줄 안다’는 소리를 듣는다. “저는 비빔냉면이 더 좋은데요”라고 눈치 없이 말했다가 “맛을 아직 모르는군” 소리를 듣기도 한다. 문화가 발달할수록 더 미묘하고 섬세한 차이에 집중하는 것은 맞는다. 문장을 잘 쓸수록 접속사 하나, 조사 하나에도 민감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대충 먹으면 무슨 맛인지 알아먹을 수 없는 음식이 ‘고급’이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 모든 말이 맞는다고 해도 “맑은 육수의 깊은 맛” 운운하며 주위를 훈계하는 모습은 영 꼴불견이다. 다 큰 어른의 음식 투정과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훌훌 비벼서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수 있는 비빔냉면의 소탈한 맛은 평양냉면과 다른 매력이 있다.

비빔냉면에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역시 함흥냉면이 우선이다. 서울 오장동에서 군림하던 세 냉면집 중 하나는 평택으로 옮겨 이제 두 집뿐이다. 오장동을 빼고 함흥냉면을 논하자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사대문 안도 아니요, 사해처럼 돈이 고이는 강남도 아닌, 영등포로 발길을 옮겨야 한다. 영등포동에 ‘함흥냉면’이란 딱 네 글자만 간판에 걸고 영업 중인 냉면집이 있다. 1967년에 문을 열었다는 이 집은 첫째로 (당연히) 회냉면이 유명하고 둘째로 김치만두로 이름을 드높인다. 간자미가 넉넉히 올라간 회냉면을 시키면 찬 육수가 같이 나온다. 혹시 비빌 때 뻑뻑할까 냉면에 부어 윤활유처럼 쓰라는 세심한 배려다. 산 낙지처럼 이에 착착 감기는 면을 맹수처럼 뜯고 당기다 보면 금세 그릇 밑바닥이 훤히 보인다. 사람이 손으로 다진 기색이 역력한 김치만두는 두부를 많이 써서 맛이 예스럽다. 할머니가 찢어주는 신 김치처럼 입을 저절로 벌리게 만드는 익숙한 맛이다. 길을 멀리 떠나 경기도 의정부에 가면 ‘평양면옥’이 있다. 을지면옥, 필동면옥 등 서울 시내 냉면 업계의 최강자들을 낳은 본가(本家)다. 연중 맛 편차가 거의 없고 김치나 만두 등 반찬과 사이드 메뉴도 떨어지는 맛이 없다. 괜히 본가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고춧가루 살짝 뿌린 물냉면을 빼놓고 이 집을 논할 수 없지만 비빔냉면도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

최근 몇 년간 서울 곳곳에 신흥 냉면 강자들이 들어섰다. 작년에 서울 강남 교대역 근처에 문을 연 ‘서관면옥’도 그중 하나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세련된 실내장식 때문에 순간 ‘냉면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당황하지 말고 자리를 잡자. 하루에 20그릇 한정이라 부지런한 사람 몫인 ‘서관면상’은 일종의 한 상 차림이다. 전유어(고기나 생선전을 가리키는 말)에 디저트까지 딸려 나온다. 육향이 그윽한 물냉면도 다져 넣은 고기가 씹히는 매콤달콤 비빔냉면도 좋지만 들기름 살살 뿌려 비벼 먹는 ‘골동 냉면’이 이 집의 히든카드다. 일일이 볶은 버섯, 무, 들깨가루, 김가루를 고명으로 올려 보기만 해도 고소한 맛이 입안에 돈다. 들기름을 넉넉히 뿌리고 식초를 살짝 가미하면 맛에 조금 더 균형이 잡힌다. 비빔냉면의 신세계다. 그물을 들고 논바닥을 헤집듯 놋쇠 젓가락으로 면을 골고루 비비는 것은 객(客)의 몫이다.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청량한 향이 그윽하게 가슴을 채우고 방앗간 앞을 지나는 듯 구수하고 정겨운 맛이 입안에 머문다. 그 맛이 이루는 풍경은 높은 곳에 서서 무게 잡지 않는다. 대신 나란히 옆에 앉아 엉덩이를 토닥이고 입을 닦아준다. 가까이 곁으로 다가오는 여름을 손짓하면서.
조선일보 B7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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