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타다' 몰고, 회사원이 밤엔 청소일… 이들은 왜 투잡 뛰나?

김아사 기자
입력 2019.06.08 03:00 수정 2019.06.08 05:41

[아무튼, 주말]
달라진 투잡 풍속도 이유도 각양각색

권윤찬(38·가명)씨는 공기업에 재직 중이지만 ‘저녁이 있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지난해부터 여섯 시 땡 하면 칼퇴를 한 뒤 두 번째 직장인 한 중소기업으로 출근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투잡족이다. 주업인 공사에선 과장으로 주요 자재를 판매하는 일을 맡지만 부업 회사에선 회계 일을 보는 말단 직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권씨가 저녁 대신 돈을 택한 것은 아니다. 그는 경기도에 본인 명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2억원가량 여윳돈도 가지고 있다. 부업 근무 형태가 시간제 아르바이트라 급여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출근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하나. 회계 일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내고 공부도 해봤지만 실제로 해보는 일은 달랐다. 회사 어음 관리부터 직원 월급 주는 일까지. 헤맬 때도 많지만 배운다는 생각에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권씨는 “남는 시간을 취미 생활에만 쓰기엔 아깝다”면서 “개인 사업에 대한 계획이 있어서 돈도 벌고 회계 업무도 배울 수 있는 일터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권씨처럼 자기만족형 투잡족이 늘고 있다. 과거에도 투잡족은 있었지만 생계형에 한정됐다. 그러나 최근엔 돈이 아닌 배움이나 자아실현, 재미 등을 위해 자발적으로 저녁이 있는 삶을 포기하는 이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잡코리아가 지난 2월 27일부터 6일간 30대 이상 직장인 20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18.6%가 ‘현재 직장 생활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에 대해 ‘수익’이라고 답한 비율은 85.8%(복수 응답)로 여전히 높았지만, ‘여유 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하기 위해’라는 응답도 31.5%를 나타냈다.

취업 시장에선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진 이들을 뜻하는 ‘N잡러’, 필요할 때마다 계약직·임시직 등을 섭외해 일을 맡기는 ‘긱잡(gig job)’ 등의 신조어가 등장했다. 한 직장에서만 일하고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전통적 일자리 개념이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돈 대신 적성과 재미

‘쿠팡 플렉스’는 자기 차를 이용해 배송 부업을 할 수 있다. 지난해 8월 시작된 이 서비스는 석 달 만에 참여자 10만명이 몰렸다. /김연정 객원기자
전자상거래 업체 쿠팡이 지난해 8월 내놓은 ‘쿠팡 플렉스’는 자신의 차를 이용해 배송일을 할 수 있는데, 석 달이 되기도 전에 등록한 인원이 10만명을 넘었다. 승차 공유 플랫폼인 타다의 경우 1회 이상 운행한 드라이버가 4300명가량이다. 부업으로 PC방 등을 하려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낮에는 본사에서 원격 관리해주고 밤에만 직접 관리하게 하는 회사도 생겼다. 근로 시간을 조절하는 게 쉬워 인기 부업이 된 경우다.

이들이 돈만 좇아 부업을 한다고 생각하면 오해. 월 3000여만원을 버는 중소기업 대표가 쿠팡 플렉스 일을 한다. 이 일을 위해 물류센터로 모여든 사람들이 끌고 온 차 10대 중 1대는 고가 외제차다. 의사나 노무사 등 전문직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남는 시간을 활용해 타다를 모는 경우도 있다.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재밌다거나 직업과는 다른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의식도 변했다. 과거엔 주업보다 부업의 대우나 임금 등이 낮다는 이유로 투잡을 꺼리는 문화도 있었다. 낮엔 대기업 사원으로 일하면서 밤엔 일용직 일을 하는 걸 달갑지 않게 여기던 시절이다. 최근의 투잡족들은 다르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최모(34)씨는 주말엔 이태원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나가 청소 일을 한다. 그는 “창업을 고려하고 있는데 직장을 곧바로 그만두기엔 위험 요소가 많았다”면서 “부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에만 신경 쓸 뿐 주변 시선 등은 관심 밖”이라고 했다.

일본, 미국에선 투잡이 일상

투잡족 증가가 국내에 한정된 일은 아니다. 일본은 아예 정부가 나서 투잡을 장려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월 ‘부업·겸업의 촉진에 관한 지침’을 발표하는 등 부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따르면 일본 도쿄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된 대기업 121곳 중 50%가량이 부업을 허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원들의 동기 향상, 경력 형성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라고 한다. 소프트뱅크의 경우 2017년 11월 직원들의 부업을 허용했고 현재는 약 430명이 부업을 갖고 있다.

일본의 1직장 1노동 원칙이 무너진 것은 노동 인구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생산성 저하로 이어져 산업 경쟁력을 낮추고 있다는 게 일본 정부의 판단이다. 2017년 기준 일본의 시간당 노동 생산성은 47.5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6개국 중 20위.

미국에선 부업을 갖고 있는 이들이 4400여 만명, 노동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수치다. ‘긱잡’은 이런 식의 최근 노동 경향을 대표하는 용어다. 스마트폰 앱 수십 개에 등록을 해놓고 단기 일자리가 뜰 때마다 확인해서 일자리를 찾는다. 10개가 넘는 긱잡을 가진 사람도 흔하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2025년 긱잡을 포함한 긱 이코노미의 부가가치가 2조7000억달러(약 318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업무 태만 등 부작용도

관리자 입장에선 직원들의 투잡이 썩 반갑지 않다. 부업을 하다 보면 주업에 소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투잡을 하는 이들도 익숙하지 않은 부업에 더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고 얘기한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권씨나 최씨 같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시간 6 정도를 부업에, 4 정도를 주업에 투자한다고 말했다.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나 직업을 구하기 위해 회사에서 구인·구직 사이트를 보고 있는 이들도 많다.

더욱이 국내의 경우 상당수 직장이 겸직을 금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주업이 아닌 부업 직장에는 등록을 따로 하지 않고 법을 피해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한 대기업 인사부서 관계자는 “투잡은 노무 관리를 어렵게 하고, 부업을 하다 사고나 불상사를 겪을 경우 책임 문제도 야기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부업에 대한 관심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다. 올해 초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투잡 희망자는 62만9000명. 전년보다 10% 넘게 증가한 수치로, 2015년 이 조사를 시행한 이후 처음으로 60만명을 넘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부업에 대한 욕구가 높다는 것은 노동시장이 경직 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며 “부업을 통해 생산성 향상, 노동시장 내 수입 격차를 줄이는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B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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