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취 중독만 인정하던 WHO, 행위 중독도 病으로 봤다

홍준기 기자 남정미 기자 유소연 기자
입력 2019.05.27 03:00

[WHO "게임중독은 질병"]
게임탓 일·공부에 문제 생기거나, 금단현상 있다면 '중독' 의심
프로게이머는 전략·확률 따지지만 게임중독자는 단순 반복만

중3 A군은 작년까지 평일은 하루 4~5시간, 주말이면 12시간씩 게임에 몰두해 부모 속을 태웠다. 겨울방학 때인 지난 1월, 부모에게 등 떠밀려 전북 무주에 있는 국립청소년인터넷드림마을에 3주 일정으로 들어갔다.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못 쓰게 되자 A군은 손톱을 물어뜯고, 쉴 새 없이 눈을 깜빡거리며 불안해했다. "집에 보내달라. 여기 못 있겠다"고 안달하기도 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5일 "게임 중독도 질병"이라고 분류한 새 국제질병분류를 194개국 대표들의 반대 없이 통과시켰다. 게임 중독이 그냥 두면 안 되는 심각한 병이라는 데 전 세계가 의견 일치를 본 것이다.

◇'행위도 과하면 질병'이라고 판단

WHO는 1990년 국제질병분류 10차 개정안(ICD-10)을 발표한 데 이어, 이번에 11차 개정안을 내놨다. 게임·도박 등 특정 행동에 대한 중독 증상도 질병으로 정의했다는 게 핵심이다. 이제까지는 술·마약 등을 섭취하는 데 중독된 경우만 질병으로 봤는데, 앞으로는 게임이나 도박 같은 '행위'에 중독된 것도 병으로 보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게임 중독에 빠진 이들이 정신과 진료나 상담을 받았지만, 진단서에 적는 병명은 우울증, 적응장애 등이었다. 법적으로도 애매했다. 게임산업법이나 청소년보호법에 '게임 과몰입·중독'을 경계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어디까지가 '과몰입'이고 어디서부터가 '중독'인지 구체적 기준이 없었다.

김래선 한국상담복지개발원 미디어중독예방부 상담부장은 "게임 시간을 줄이고 싶은데 줄이기 힘든 경우, 게임으로 성적이 떨어지고 시력 저하·목 통증 등을 호소하는 경우, 게임 때문에 가족과 갈등을 겪는 경우 등을 '게임 과(過)의존' 등으로 보고 상담해왔다"고 했다. 정영철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교수는 "의사들이 각자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상황"이라고 했다. 이번 개정으로 앞으로는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서에 '게임 중독'이라고 적을 수 있게 됐다. 통계가 쌓이면 의사들이 이 병이 언제 생기고 어떤 치료가 효과적인지 좀 더 정확히 연구할 수 있게 된다. 정부도 예산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된다.

◇삶이 흔들릴 정도라야 '게임 중독'

하지만 단순히 술을 즐긴다고 '알코올 중독'이 아니듯, 시간 날 때 게임을 2~3시간 즐긴다고 게임 중독은 아니다. 게임 중독을 다른 병처럼 피검사나 MRI로 가려낼 방법도 없다.

정영철 교수는 "사람들이 '왜 프로게이머는 몇 시간씩 게임해도 중독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묻는데, 같은 게임이라도 프로게이머는 확률과 전략을 따지면서 하지만 게임 중독 청소년들은 자기가 잘하는 전략만 반복하며 사고하지 않고 몰입한다"고 했다. 실제로 정 교수가 게임 중독 환자 24명의 뇌를 연구해보니, 문제를 해결할 때 나오는 뇌파가 아닌 단순 반복하는 행동을 할 때 보이는 뇌파가 나타났다.

정 교수는 "게임 때문에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기면 게임 중독인지 의심해볼 만하고, 일상생활에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도 계속 하는 단계가 되면 확실히 게임 중독"이라면서 "게임 중독이 정식 병명이 되면 각기 다른 병명으로 치료받던 사람들이 공식적인 하나의 질병 이름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는 미국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 제5판(DSM-5)'에 나와있는 진단법〈그래픽〉이 가장 구체적이다. 게임을 하지 않을 때조차 온종일 게임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지면서 점차 게임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경우, "너 게임 몇 시간 했니"라는 부모의 질문에 거짓말하고, 스스로도 '게임 좀 그만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경우, 게임을 못 하면 금단 증상이 생기는 경우, 게임 때문에 일과 공부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경우다.

◇문제 자각하는 게 치료 첫걸음

교육 현장에서는 "아이들이 부모·형제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 전보다 게임에 쉽게 빠져드는 것 같다"는 우려가 계속 나왔다. 저소득층 아이들일수록 어른들이 세심하게 돌보지 못해 게임 중독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조기에 상담·치료해야 중독이 심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심용출 국립청소년인터넷드림마을 박사는 "치유 캠프 3주 과정을 마치면, 학생들이 '게임을 너무 많이 하면 위험하니 조금 시간을 줄여야겠다'는 자기 통제력을 갖게 된다"고 했다.

한국교총은 "이번 조치를 계기로 학교와 지역이 연계해 상담 치유 체계를 만들고, 16세 미만 어린이·청소년이 오전 0~6시 사이 게임을 못 하게 막는 '셧다운제'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A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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