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박한 밥이 받치고, 쫄깃한 당면이 눌러… 이 잡채밥에는 기합이 들어 있다

정동현
입력 2019.05.25 03:00 수정 2019.05.25 11:48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잡채밥 편
서울 둔촌동 '국보성'

서울 둔촌동의 작은 중국집 '국보성'에 가면 짜장면이나 짬뽕보다 잡채밥을 시키는 게 좋다. 물기 없이 매콤한 잡채와 담백한 볶음밥이 만나면 한 그릇 다 비우기도 전에 다시 와서 먹어야겠단 생각이 절로 든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0년간 당구장 집 아들로 살았다. 당구장 한쪽 내실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당구공을 굴려 다른 당구공을 맞히는 데 정력과 시간을 쏟는 수많은 사내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내들과 비슷한 수의 불어 터진 짜장면 그릇을 치웠다. 짜장면의 영원한 라이벌 짬뽕은 드물었다. 순번대로 공을 치다 보면 면이 국물을 몽땅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간혹 예외가 있었다.

"짜장면 둘, 잡채밥 하나!"

잡채밥 소리가 들리면 나는 고개를 들어 누군지 살폈다. 그 시절 당구장 손님이라는 게 대부분 입에는 담배를 물고 손에는 당구 큐를 잡은 폼은 모두 어슷비슷.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잡채밥을 외치는 이들은 뭔가 달라 보였다. 허리를 좀 더 낮춰 공을 치는 것 같기도 했고 머리를 남들보다 한 번 더 쓸어 넘기는 듯싶기도 했다. 잡채밥 먹는 이유는 아마도 면(잡채)과 밥을 모두 먹겠다는 간편한 심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허겁지겁 젓가락질을 하고 당구공 치기 바쁜 이들 틈에서 자기 취향을 지키는 모습이 그저 멋졌다. 속으로 그네들이 이기기를 바랐다. 공이 살짝 어긋나면 나도 모르게 '아!' 하고 짧은 탄성을 질렀다.

서울 둔촌동의 작은 중국집 '국보성'.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나이가 들어서는 잡채밥 시키는 버릇이 들었다. 덕분에 잡채밥 하면 몇몇 집이 떠오른다. 그중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중국집이라는 을지로 '안동장'은 굴짬뽕과 중식 냉면으로 유명하지만 잡채밥도 알아준다. 나이 지긋한 종업원이 날라주는 잡채밥을 보면 국물이 얕게 깔린다. 짙은 색에서 간간한 기운도 느껴진다. 잡채만 건져 먹으면 균형이 맞지 않는다. 밥과 잡채를 한 숟가락에 야무지게 올려 입에 넣어야 제대로 먹는다 할 수 있다. 무던한 맛과 촉촉한 질감에 시나브로 술술 한 그릇이 비워진다. 긴 세월을 잇는 잔잔한 음식이다. 강남으로 넘어가 근래 분점을 여럿 낸 '송쉐프'에 가면 힘을 잔뜩 줘 볶은 잡채밥을 만날 수 있다. 기름기 가득 먹은 볶음밥을 밑에 깔고 통통한 잡채에 고기를 가득 넣어 볶아 올렸다. 그 위에는 튀기듯 구운 달걀 프라이가 또 얹힌다. 곁들여 내는 짬뽕 국물에 무게감이 완연한 잡채밥의 조합에는 쉬어 갈 틈이 없다. 그 자극에 자꾸 찾게 된다. 혀가 아니라 마음이 가는 곳을 꼽는다면 강동구 둔촌동 '국보성'이다. 본래 용산 효창운동장 근처에서 가시나무처럼 살이 쫙 빠진 노인장이 홀로 주방을 지키던 곳이었다. 지금 그이는 은퇴하고 아들이 가게 이름을 이어받았다. 둔촌동 한적한 골목에 새로 자리를 잡은 국보성은 여전히 작다. 좌석은 스무 자리가 채 안 된다. 그럼에도 운이 나쁜 몇몇은 짜장면 한 그릇도 꽤 시간이 걸려 받았다. 요령 없이 그때그때 음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아는 동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순하게 음식을 기다렸다.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물기 없이 볶은 간짜장도 인기가 좋았다. 이탈리아 남쪽에서 먹는 꾸덕꾸덕한 파스타처럼 면에 소스가 착 달라붙었다. 혀에 느껴지는 맛에는 헐거운 기운이 없었다. 간짜장만큼 잘나간다는 잡채밥에도 기합이 들어있다. 잡채 밑에 깐 볶음밥은 숟가락만 스쳐도 포슬포슬 가볍게 날렸다. 물기도 기름기도 없다. 가는 당면에 고추기름 곁들여 매콤하게 볶은 잡채에도 빈 구석이 없었다. 밥과 잡채를 따로 먹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조금 공을 들여 한 번에 먹으면 질박한 볶음밥이 밑을 받치고 쫄깃한 식감과 또렷한 맛을 지닌 잡채가 화려한 색을 발했다. 값싼 음식이지만 가게를 지키는 내외 얼굴엔 자부심이 어렸다. 손님이 밀려도, 수고스러워도 매번 새롭게 음식을 해내는 고집과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춤을 추듯 냄비를 흔들던 옛 어르신이 보였다. 대를 이어가며 지키는 한 그릇이었다. 흔히 먹고 흔히 팔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음식이었다.
조선일보 B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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