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공방 되살리기로 패션 聖地를 수호하라

파리=최보윤 기자
입력 2019.05.24 03:02

샤넬 패션총괄사장 파블로브스키
'세계 패션의 수도' 파리 재건 위해 소규모 영세 공방들 지원·협업 나서…

흰 실 3번, 하늘색 8번, 금사 2번…. 종이에 적힌 지시에 따라 좌우, 위아래로 베틀이 철컥철컥 움직인다. 실크 리본 소재와 스팽글이 달린 실, 단단한 가죽 같은 이질적인 소재에 적당히 탄력을 주며 춤추는 듯한 손놀림으로 어느덧 완성되는 '샤넬식' 트위드 원단. 마치 현대미술가 솔 르윗이 그리드(격자 틀)에 반복적인 패턴을 그려 완성한 드로잉 같다.

프랑스 파리 외곽 팽탕에 위치한 161년 역사의 자수 공방 르사주 장인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오는 28일 서울 성수동 복합 문화 공간 'S팩토리'에서 열릴 '2019파리-뉴욕 공방 컬렉션 레플리카쇼' 의 자수와 트위드 원단을 완성한 이들이다. '레플리카쇼'란 공식 쇼 외에 그 해 가장 중요한 한 국가를 정해 똑같은 작품을 다시 보여주는 무대. 카를 라거펠트가 죽기 전 해외(뉴욕)에서 선보인 마지막 디자인을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자리다.

최근 프랑스 파리 사무실에서 만난 브루노 파블로브스키(작은 사진) 샤넬 패션총괄사장은 "단지 우리 브랜드를 위해서가 아니라 파리가 100년 뒤에도 '패션 수도, 창의력의 도시'란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공방을 수호하는 것"이라며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라도 현실화할 장인들이 없다면 소용이 없어 '노하우'에 투자하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열린 ‘19 파리-뉴욕 샤넬 공방 컬렉션’ 의상. 오는 28일 서울 쇼 무대에서 선보인다. /샤넬
샤넬은 2002년부터 파리 시내 100여 년 역사의 크고 작은 수공예 공방들을 순차적으로 인수했다. 전체 70여 개 중 28개 공방을 사들였다. 6년 전 팽탕에 5000㎡(약 1512평) 건물을 매입해 쓰러져 가는 공방을 옮긴 데 이어 2020년엔 세계적인 건축가 루디 리치오티에게 의뢰한 2만5000㎡(약7562평) 규모의 공방을 연다. 그 공로로 샤넬은 지난해 10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프랑스 최고 문화상을 받았다. "20~30명의 장인으로 독립 운영되는 소규모 공방들이 금전적으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아요. 지원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빈자리를 샤넬이 채워주는 겁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브랜드를 지키면서 타 브랜드와도 얼마든지 작업할 수 있지요."

보석 공방 ‘구쌍’.

르사주에서 차로 5분이면 닿는 125년 역사의 마사로 신발 공방을 찾았다. 익숙한 가죽 냄새가 마중 나왔다. 샤넬 구두 하면 생각나는 블랙과 베이지 투톤 슈즈가 1957년 이 공방에서 탄생했다. 곶감 말리듯 줄줄이 걸려 있는 라스트(발 모양 틀)엔 레이디 가가, 퍼렐 윌리엄스 등 유명인 이름이 잔뜩 적혀 있었다. 보석을 만드는 구쌍 공방에선 샤넬뿐 아니라 LVMH, 케어링그룹 등 경쟁 브랜드의 주문서도 가득했다. 브루노 CEO는 "작업대에서 일하는 젊은 장인들의 숫자가 점점 느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면서 "장인이란 직업을 매력으로 느끼는 젊은 층의 축적된 에너지가 프랑스 패션을 움직이는 새로운 심장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유한회사라 매출 등 공시 의무가 없던 샤넬은 지난해 창립 108년 역사상 처음으로 경영 실적을 공개했다. 2017년 기준 96억달러(약 11조원)로 루이비통에 살짝 뒤졌지만, 샤넬이 여성 패션만 내놓는 걸 감안하면 상당한 수치다. "매출 공개 결단은 그간 너무 많은 가짜 뉴스가 나돌았기 때문이지요. 실적이 어떻다는 둥 샤넬의 오너가 회사를 팔고 싶어 한다는 등의 루머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예요. 경영위원회 고민 끝에 직원, 고객, 파트너에게 투명성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저 리더라고 말하면서 믿어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제 간편하게 숫자로 더 쉽게 확인될 수 있으니까요."


조선일보 A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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