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사실무근'이 기밀이라니

김경화 정치부 기자
입력 2019.05.24 03:14
김경화 정치부 기자

주미 한국 대사관의 K외교관이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에게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유출해 청와대 감찰을 받고 있다고 한다. 유출됐다는 대화 내용은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5월 말 방일(訪日) 직후 한국에 잠깐이라도 들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청와대는 이를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허위 사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후 외교부 직원들의 휴대폰 통화 기록을 일일이 확인하며 대대적 보안 조사를 벌였다. '내부 정보 유출자'를 색출한 것이다. 청와대는 이날 유출 당사자를 확인했다면서 강 의원에 대한 '기밀 유출'에 해당한다고 했다. 국가 정상 간 통화 내용은 '3급 비밀'에 해당한다. 비밀을 누설한 외교관은 처벌이나 징계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청와대는 유출됐다는 내용은 여전히 '사실무근'이라고 했다. 사실무근의 허위 정보를 말한 것이 어떻게 기밀 유출이 되는 것일까. 청와대의 발표 자체가 자기모순적이었다. 청와대가 허위라고 비판했던 야당 의원의 주장이 오히려 '사실 아니냐'는 심증이 커질 뿐이다.

청와대는 그동안 자신들에게 불리한 보도만 나오면 무조건 '사실무근'이라며 부인부터 한 경우가 많다. 그러고선 뒤에선 청와대와 부처 공무원들에 대한 '휴대폰 털기'에 나섰다. 이번 정부 들어 청와대의 외교부 보안 조사는 15차례 이상 있었다고 한다. 2017년 말 정부가 중국과 물밑 협상을 통해 '사드 3불(不) 원칙'을 정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당시 청와대 특감반은 외교부 간부 10명의 업무용 휴대폰은 물론 개인 휴대폰까지 제출받아 조사했다. 범죄 수사 때 사용되는 '포렌식 조사' 방식까지 동원해 샅샅이 캤다. 유출 관련 정황은 나오지 않았지만, 고위 간부는 사생활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작년 11월 '한·미 동맹 균열이 심각하다'는 내용이 담긴 청와대 문건이 보도됐을 때도 비슷했다. 청와대는 형식·서체 등을 근거로 청와대 보고서가 아니라고 부인부터 했다. 그리고 외교부를 진원지로 지목하고 보안 조사는 물론 경찰 수사까지 의뢰했다. 하지만 청와대 문서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청와대 경호처장이 부하 직원을 가사 도우미로 썼다는 의혹 보도가 나오자 청와대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경호처 직원 150명 이상에게 휴대폰 통화·문자 메시지 기록을 제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쯤되면 청와대의 '무조건 부인'과 '공무원 휴대폰 털기'는 습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사실무근'이라고 해놓고 공무원들의 휴대폰을 뒤지면 '사실무근'이라는 해명 자체를 뒤집는 셈이 된다. 청와대가 국민들에게 진실을 숨긴 채 공무원들만 잡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게 군기를 잡는다고 진실이 숨겨지는 것도 아니다. 국민의 불신만 자초할 뿐이다.



조선일보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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