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숟가락 함부로 얹지 말라

이인열 산업1부 차장
입력 2019.05.20 03:13 수정 2019.07.29 18:48
이인열 산업1부 차장

1983년 고(故)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 선언'으로 시작된 삼성의 반도체 역사에서 비메모리 반도체는 늘 찬밥이었다. 삼성은 양산기술과 공정기술이 중요한 메모리 반도체에 주력했다. 비메모리 반도체를 담당하는 시스템 LSI 사업부가 생긴 게 1997년의 일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D램·낸드 등 데이터를 저장하는 반도체이고, 비메모리 반도체는 PC와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CPU와 AP, 이미지 센서 등을 말한다. 메모리는 가격 등락이 워낙 심한 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1996년 메모리 폭락을 경험한 삼성의 수뇌부에 메모리와 비메모리의 균형 성장은 숙원이 된다. 하지만 비메모리에는 인텔과 퀄컴 같은 기라성 같은 글로벌 공룡 업체들이 있어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2002년엔 연구 인력을 1700명에서 2200명으로 대폭 늘렸고, 2005년엔 마침내 비메모리반도체 전용 라인까지 세웠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PC 시대가 가고 모바일 시대가 온 것이다. 2010년엔 엑시노스라는 브랜드까지 단 모바일용 비메모리를 내놓으며 본격 성장을 시작했다. 뒤처져 있다고 쉽게들 말하지만, 삼성의 비메모리에는 20년 넘는 눈물의 역사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월 국무회의에서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경쟁력을 높여 메모리 반도체 편중 현상을 완화하는 방안을 신속히 내놓기 바란다"고 했다. 메모리 편중은 삼성의 약점이긴 하지만, 다른 정부라면 몰라도 현 정부가 삼성을 위한 고민을 대신한다는 게 의아했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메모리와 비메모리 둘 다 잘하는 기업도, 국가도 없다. 한 달쯤 뒤 수수께끼가 풀렸다.

삼성전자는 4월 30일 화성사업장에서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비전 선포식'을 열고, 13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바로 이 자리에 문 대통령이 참석했다. "원대한 목표 설정에 박수를 보내며 정부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격려했다. 삼성의 지난 20년간 노력을 모르면, 대통령의 '혜안'에 세계적 기업이 즉각 응답한 '한 달 새 벌어진 드라마'라고 오해할 것이다.

현 정권에 상당수 국민은 경제 엔진이 아니라 브레이크만 양산한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래서인지 비메모리, 수소경제 등을 '정부의 업적'으로 치장하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건 정권이 기업의 역량에 숟가락을 올리는 일이다. 대통령 말이 없었다고 삼성전자나 현대차가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대통령 말 한마디에 기업이 난리법석을 떠는 모양새가 코미디에 가깝다. 정부가 진짜 엔진을 만들고 싶다면 규제를 풀고 노동 개혁을 해 기업들이 뛰어놀 운동장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 없다면 최소한 숟가락 함부로 얹어서 기업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라도 하지 말라.



조선일보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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