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야당 때 중시 '재정건전성', 대통령 되더니 노골적 무시

입력 2019.05.20 03:20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재정의 과감한 역할"을 주문하면서, 기획재정부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40%가 "(재정건전성의) 마지노선이라는 근거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고 한다. 재정이란 정부가 국민 세금을 쓰는 것을 말한다. 예산 총괄 부처에 앞으로 40%에 구애받지 말고 재정 보따리를 더 풀라고 지시한 셈이다. '40%'는 지난 2015년 정부와 민간 재정 전문가들이 공동 작업 끝에 내놓은 장기 재정건전성의 기준선이다. 당시 정부는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2060년까지 국가채무비율을 40% 이내로 관리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문 대통령도 야당 대표 시절엔 이 준칙을 그대로 수용했었다. 문 대통령은 4년 전 민주당 대표일 때, "2016년 예산안에서 국가채무비율이 사상 처음으로 GDP 대비 40% 선을 넘었다.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으로 여겨왔던 40%가 깨졌다"며 "새누리당 정권 8년, 박근혜 정부 3년 만에 나라 곳간이 바닥나서 GDP 대비 40%, 730조원에 달하는 국가 채무를 국민과 다음 정부에 떠넘기게 되었다"고 비난했다. 앞뒤 발언이 같은 사람 머릿속에서 나온 게 맞나 싶다. 의도는 뻔하다. 선거용 세금 퍼붓기에 방해가 될 요소를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다.

문 정부는 집권 후 국민 세금을 눈먼 돈처럼 여기며 온갖 곳에 퍼부어왔다. 전년보다 9.5%나 늘어난 수퍼 예산(470조원)을 짜고도 예산 집행을 시작한 지 몇 달도 안 돼 추가경정예산까지 6조7000억원을 편성했다. 추경까지 집행되면 올해 우리나라 국가채무비율은 39.5%까지 올라간다. 이번 재정전략회의에서 일자리 부위원장 등은 "(내년 예산) 두 자릿수 증가율"을 요구했다고 한다. 일자리 예산 증액, 예비 타당성 조사 면제 사업(24조원 규모) 추진, 기초연금 인상, 근로장려세제(EITC) 확대 등 각종 선거용 매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년 예산은 500조원을 돌파할 것이 확실시된다. 모두 국민 세금이고 국민 부담이다. 경기 침체로 세금마저 잘 걷히지 않으면 재정건전성은 더 악화될 것이다.

현재 우리 국가채무비율은 OECD 평균치(113%)보다 낮다. 하지만 국민소득 3만달러 시절 영국·독일 등 선진국 국가채무비율도 40~50% 수준이었다. 게다가 우리나라 부채 증가 속도는 매우 빠르다. 2000~2016년 사이 국가채무 증가율은 11.6%로 OECD 국가 중 넷째로 높다. 공무원·군인연금 부채를 반영한 넓은 의미의 국가 부채는 이미 1700조원을 넘어섰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화 속도와 저출산율을 감안하면 재정건전성 유지는 국가적으로 절박한 과제다. 몇 달 전 기획재정부 국고국 청년 사무관이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던 것도 재정건전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이 재정건전성 보루를 튼튼히 하는 것이 아니라 허물려고 한다. 현 집권 세력엔 내년 총선과 정권 연장 외엔 다른 어떤 국정 과제도 안중에 없어 보인다.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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