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이 맑은 국물의 '첫라멘' 농밀한 검은 육수의 '끝라멘'

정동현
입력 2019.05.18 03:00 수정 2019.05.18 03:39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일본 라면편

서울 서교동 '세상 끝의 라멘'

2016년 기준 한 해에 1인당 76개의 라면을 끓여 먹는 이 나라에 '라멘(일본 라면)'은 있기도 했고 없기도 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이 섬나라에서 비롯된 모든 것을 악(惡)이오, 청산해야 할 것이라 여기던 시절이 있었던 탓이다. 19~20세기 중국의 '라몐(拉麵)'에서 유래한 일본 라멘에는 여전히 중국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면 위에 올라가는 '차슈(燒豚·돼지고기 고명)'나 절인 죽순을 발효시킨 '몐마(麵麻)' 모두 중국에 뿌리를 둔 음식이다. 하지만 대륙에선 닭육수를 우려 간장이나 소금으로 간해 먹던 것이 바다를 건너니 온갖 해산물과 돼지뼈, 닭뼈 등 일본 열도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우리고 졸이고 자르고 데쳐서 넣은 음식이 됐다. 한국도 라멘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생라면' 혹은 '일본 라면'이란 애매모호한 말로 부르고 먹던 라멘은 2004년 문을 연 서울 홍익대 앞 '하카타분코'의 성공을 기점으로 운명이 달라졌다. 1998년 일본 문화 개방에 뒤이어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넘어가 라멘 맛을 봤다. 재료, 요리사, 트렌드가 신속히 한국으로 건너왔다. 라멘을 라멘이라 부르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표 메뉴인 맑은 국물의 '첫라멘'(오른쪽)과 진한 국물의 '끝라멘'(왼쪽), 그리고 한입에 쏙 들어가는 교자. 시원하게 속을 쓸고 무겁게 위장을 채우며 잡맛 없이 끝을 내는 조합이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금 한국에서 라멘의 첨단을 찾는다면 여전히 홍대 일대로 가야 한다. 그중에서도 '잇텐고'는 현시점에서 가장 뜨거운 라멘집이라 할 만하다. 강변북로로 나가는 양화대교 북단 교차로 근처, 이면도로에 자리 잡은 이 집은 12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말발굽 모양의 바 테이블밖에 없다. 여느 라멘집이 그러하듯 메뉴는 단출하다. 돼지뼈를 우려 국물을 낸 '키츠네', 청양고추가 들어가 매운 '키요사마', 바질페스토가 들어간 '미도리카메' 세 가지가 전부다. 이곳에서 한 그릇만 맛을 봐야 한다면 당연히 '미도리카메'다. 먹어보기 전까진 그 맛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맨 점원이 그릇을 앞에 두고 가는 순간 상상할 수 없던 맛은 현실이 된다. 레몬을 닮은 달콤한 바질 향기가 하얀 김과 함께 모락모락 콧속으로 스며들 때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먹는다. 초록빛 바질이 동동 떠 있는 하얀 국물은 정갈한 일본식 정원처럼 잡내 하나 없다. 속에 살짝 심이 남을 정도로 삶아낸 면이 국물과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여기에 새콤하게 맛을 낸 토마토절임을 곁들이면 느끼하지도 짜지도 않은, 향긋한 라멘 한 끼가 탄생한다.

낭만적인 상호에 어울리는 분위기의 서울 서교동 '세상 끝의 라멘' 내부.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잇텐고'의 작은 쪽문으로 나와 발걸음을 홍대역 쪽으로 옮기면 멀지 않은 곳에 '세상 끝의 라멘'이 있다. 감성적인 상호뿐 아니라 초록빛 가로수가 서 있는 도로 한편에 깨끗이 닦은 유리창 너머로 노란빛을 밝힌 외양마저 일본 소설 같은 식당이다. 이 집은 오사카식 라멘을 낸다. 비교적 자리가 넉넉한 것도 통 크다는 오사카 인심을 닮은 듯하다. 역시 세 종류의 라멘을 파는데 그중 오랜 시간 우린 닭뼈육수에 일본 된장(미소)을 푼 '미소파이탄'은 하루에 20그릇밖에 팔지 않는다. 언제고 먹을 수 있는 메뉴는 맑은 닭육수에 해산물 육수를 섞은 '첫라멘'과 오사카풍으로 닭육수에 간장을 섞어 검은색을 띤 '끝라멘'이 있다. 첫라멘은 이름만큼이나 에누리없이 깔끔한 맛이 난다. 해산물 육수를 쓴 덕분에 감칠맛이 자글자글거리며 입안에서 맴돌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이어진다. 검은 육수를 담은 끝라멘은 첫라멘보다 훨씬 강렬하다. 한 젓가락 먹을 때마다 느껴지는 농밀한 풍미는 수묵화처럼 부드럽고 내성적인 검은색을 닮았다. 까만 붓이 하얀 종이 위를 지나가듯,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차분히 한 그릇을 비우게 된다. 그리고 나직이 숨을 쉬고 나면 보이는 창 너머 봄의 마지막. 이 땅에도 저 땅에도 공평하게 찾아오는 맛과 계절이 그곳에 있다.

조선일보 B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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