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계산따라 脫원전한 벨기에, 만성 전력난"

임경업 기자
입력 2019.05.15 03:01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첫날 / 기로에 선 세계: 구체적 해법을 찾아서]
르테름 벨기에 前총리
"에너지정책은 정치 선언 아니라 토론과 민주적 절차따라 결정해야… 한국도 우리같은 상황 경계를"

"에너지 전환 정책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팩트와 숫자'를 바탕으로 치열한 토론 끝에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 없이 정치적으로 탈(脫)원전을 결정했던 벨기에는 에너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14일 ALC '에너지정책과 민주주의 원칙' 세션에서 연설한 이브 르테름 전 벨기에 총리가 각국의 에너지 정책을 설명하며 한 말이다.

14일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 첫날 '진실의 순간: 평화와 번영을 위한 리더십의 역할' 을 주제로 세션이 열리고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14일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 첫날 '진실의 순간: 평화와 번영을 위한 리더십의 역할' 을 주제로 세션이 열리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고촉통 전 싱가포르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로타어 데메지에르 전 동독 총리, 이브 르테름 전 벨기에 총리, 에후드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 마테오 렌치 전 이탈리아 총리, 에드윈 퓰너 전 헤리티지 재단 회장. /박상훈 기자
그는 "신재생에너지는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기엔 발전 효율이 낮기 때문에 원전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션 후 인터뷰에서는 "탈원전을 추진 중인 한국 정부가 벨기에 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을 경계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이 벨기에처럼 원전을 대체할 에너지 생산 계획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규모 전력 부족 사태를 겪을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다.

벨기에는 한국보다 14년 빠른 2003년 탈원전을 선언하고, 2025년까지 가동 중인 원전을 모두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르테름 전 총리는 "당시 여당은 녹색당을 연정(聯政)에 끌어들이기 위해 충동적으로 탈원전을 선언했다"며 "객관적 자료와 대안 없이 내린 정치적 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8년 3~12월, 2009년 11월~2011년 12월까지 두 차례 총리를 지내면서 원전 수명을 연장해야 한다고 설득해 왔다.

르테름 전 총리는 "벨기에는 원전 비중이 40% 내외로 여전히 가장 높고, 재생에너지는 12%에 불과하다"며 "그런데도 지난해 전력 수요의 22%를 수입해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했다. 벨기에는 2000년대 중반까지 전력 수요의 10% 내외를 수입했다. 2009년엔 원전 비중이 54%에 육박하면서 에너지 자급에 성공했지만, 지금은 '블랙아웃(대정전)'을 걱정할 정도로 전력난을 겪고 있다. 노후한 원전 7기 중 6기가 수리로 가동 중지 상황인 데다, 탈원전 선언 이후 신규 원전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에너지 전환 정책은) 감정적, 정치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민주적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가는 국민에게 에너지와 관련된 모든 숫자와 통계, 데이터를 제공하고, 이 자료들은 (특정 정책에) 편향돼서는 안된다"며 "그런 다음에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토론과 정치적 합의를 거쳐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르테름 전 총리는 스웨덴을 모범 사례로 들었다. 스웨덴은 1980년 국민투표를 통해 탈원전을 결정했지만, 현실 여건을 고려해 정책 추진을 미루다 3년 전에야 여야(與野) 합의로 본격적인 탈원전에 착수했다.

그는 "재생에너지 확대는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지만, 어쩔 수 없이 원전을 써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대기오염의 주범인 석탄과 천연가스를 무한정 뗄 수 없다면 대안은 원전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탈원전에 대해서는 "부디 객관적인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확실한 대안을 마련해 둔 다음, 탈원전에 착수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조선일보 A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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