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쿠데타 실패는 변절에 변절 거듭한 배신자 때문

정시행 기자
입력 2019.05.15 03:01

모레노 대법원장, 거사 정보 유출
일각 "그는 트로이 목마였다"

최근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을 몰아내려던 야권의 쿠데타 시도는 거사 이틀 전 정보가 누설돼 실패했다. 이 쿠데타 실패는 사법부 수장의 막판 배신 때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마이켈 모레노(53·사진) 대법원장은 니콜라스 마두로(56)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야권의 쿠데타 계획에 은밀히 참여했다가 거사 직전 이들에 등을 돌리면서 변절에 변절을 거듭했다.

워싱턴포스트(WP)가 13일 보도한 쿠데타 막전막후에 따르면 지난 4월 23일 밤 크리스토퍼 피게라 전 비밀경찰 국장과 유력 사업가 케사르 오마나 등 키맨들이 모레노 대법원장 소유 카라카스의 호화 저택에서 최종 점검 회의를 가졌다. 야권은 쿠데타 성공 시 임시정부 정통성을 확보하고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데 사법부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 일찍부터 모레노를 끌어들였다. 모레노는 공식적으론 마두로 정권 부역자로 미 재무부 제재 대상이었으나 물밑에선 미국의 신변 보호 약속을 받은 상태였다.

이날 회의 참석자들에 의하면 갑자기 모레노가 "만일 쿠데타가 실패하면"이라고 운을 떼더니 "난 미국에 도망가 월마트에서 마누라 장바구니나 들어주는 처지가 될 텐데"라고 투덜댔다. 이어 "성공하면 후안 과이도(35)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이 되는 건가? 왜 꼭 과이도지?"라며 "내가 잠시만 임시정부를 이끌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황한 참석자들은 과이도가 미국 등 국제사회가 인정한 수반이란 점, 대법원은 나서지 않는 게 좋다는 점을 들어 만류했다.

수긍하는 듯했던 모레노는 28일 회의에서도 계속 딴지를 걸었다. "내일(29일) 내가 '마두로 정권을 승인 않는다'는 성명을 내기 전 군부부터 성명을 내게 하라" "어떤 경우든 내 가족 신변이 보장되는 확실한 방안이 있느냐"고 했다. 야권 내 긴장이 팽배해졌다. 그러다 29일 밤 "마두로가 계획을 눈치챈 것 같다"는 전갈이 돌더니 피게라가 비밀경찰 국장직에서 전격 경질됐다. 모레노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야권은 5월 1일로 잡았던 거사일을 하루 앞당겨 30일 급하게 쿠데타를 감행했지만 이미 패색이 짙었다. 모레노 대법원장은 이후 동지였던 쿠데타 주동 세력들을 잡아들여 반역죄로 즉결 심판 중이다. 일각에선 그가 처음부터 정보 파악을 위해 야권에 침투한 '트로이 목마'였다는 말도 나온다.

모레노 대법원장은 전임 대통령 우고 차베스(2013년 사망) 시절부터 베네수엘라 좌파 독재의 첨병 노릇을 한 인물이라고 미국·유럽 정보 당국은 파악해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그는 1980년대 정보기관 요원으로 취직해 카를로스 페레스 전 대통령의 경호원으로 일하다 살인죄로 복역한 뒤 법대에 진학해 1995년 변호사 자격을 땄다. 모레노는 법률 조언을 해주던 차베스가 1998년 집권하자 곧 판사로 임용되고 2004년 대법관에 앉았다. 차베스의 친(親)정부 대법원은 모든 판결을 정권 입맛에 맞게 짜맞추며 반대파 숙청을 도왔다.

모레노는 2007년 뇌물 수수와 사법 거래 혐의로 낙마했으나 정권의 배려로 외국 대사로 피신했다가, 2014년 신임 마두로 대통령 부인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대법원에 복귀했다. 그는 2017년 대법원장이 되자마자 야당이 선거로 장악한 의회를 해산하고 입법권을 대법원으로 가져오는 희대의 '삼권분립 해체쇼'를 벌여 세계를 경악시켰다. 또 26세 연하의 미스 베네수엘라 출신과 결혼했으며, 미국·파나마 등에 재산을 은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A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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