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쿠바 청년들의 필수품

선우훈 만화가·만화평론가
입력 2019.05.15 03:01
선우훈 만화가·만화평론가
지난해 광주 비엔날레에 디지털 그래픽 작품을 출품한 적이 있다. 작품 설치를 끝내고 전시장을 둘러보다 어느 쿠바 작가의 작품에 눈길이 머물렀다. 영상 및 디지털 서버로 구성된 설치작이었는데, 화면에 간혹 '1박 2일' 같은 한국 유명 TV 예능이 재생되곤 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 예능 프로는 쿠바에서 무단 복제돼 유통되는 중이었고, 쿠바 작가 네스터 시레 등이 제작한 이 작품은 '엘 파케테 세마날(주간 패키지)'이라 불리는 유통망에 대한 것이었다.

'엘 파케테 세마날'은 간단히 말해 1테라바이트 크기의 하드디스크다. 서구 영화·드라마·음악 등 최신 콘텐츠를 매주 업데이트해 신문 배달하듯 쿠바 전국의 가입자에게 배송하는 일종의 '오프라인 인터넷'이다. 이를 배달받은 가입자들은 필요한 콘텐츠를 24시간 동안 자기 컴퓨터로 복사할 수 있고, 다음 날 배달원이 하드디스크를 회수하러 왔을 때 요금을 지불한다.

오랜 경제 제재로 물자가 크게 부족했던 쿠바는 저작권 개념을 일찍이 폐기한 그야말로 '해적판의 나라'다.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최저 수준인 쿠바에서 '엘 파케테 세마날'은 쿠바 젊은이들에게 필수품과도 같다. 워낙 인기가 좋다 보니 여기에 광고를 싣는 회사까지 등장할 정도로 현재는 쿠바의 통합 미디어가 됐다고 한다.

한국 인기 드라마나 TV 예능 등이 북한에서 비밀리에 무단 유통되면서, 북한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적 있다. 오랜 고립의 세월을 겪은 쿠바 역시 이 같은 문화 접촉은 분명 점진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접촉이 더 잦아지고 교류가 늘수록 복제는 저작권 개념을 가져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특별한 유통망도 사라질 것이다. 네스터 시레는 내게 "올해 쿠바 아바나 비엔날레 기간 특별전에 '엘 파케테 세마날' 관련 작품을 출품하고자 하는데 거기에 당신 그림을 넣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멀리서 일어날 변화에 동참하고 싶어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조선일보 A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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