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신동빈과 마주 앉은 트럼프

김홍수 논설위원
입력 2019.05.15 03:16
1997년 5월 한라그룹이 영국 웨일스에 지은 건설 중장비 공장 준공식에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나타났다. 여왕은 부군과 함께 공장 가동 스위치를 누르고 축사도 하며 준공식장을 끝까지 지켰다. 220억원을 투자해 300명을 고용하는 공장이니 큰 규모도 아니었다. 불과 300명 일자리를 위해 영국 여왕이 자동차로 4시간 거리를 마다치 않고 달려온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2년 뒤 삼성전자가 윈야드에 지은 전자레인지 공장 준공식에도 5시간 이상 열차를 타고 와서 참석했다.

▶기업 투자를 받고 일으키는 일이라면 아베 일본 총리도 뒤지지 않는다. 그는 집권 후 매년 첫 골프를 재계 단체 회장단과 함께 한다. 종종 기업인 자녀의 결혼식까지 참석한다. 2008년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만나자 발끈한 중국이 에어버스 여객기 100대 구매 계약을 취소했다. 몇 달 뒤 후진타오 주석이 런던을 방문하자 사르코지는 밤중에 호텔로 찾아가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지한다며 달랬다. 결국 200억달러 구매 계약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선 적폐 신세지만 우리 기업인들도 외국 나가면 칙사 대접을 받는다. 베트남 총리는 지난해 10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집무실로 초청해 1시간 동안 면담했다. 10만명을 고용한 삼성의 베트남 투자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지난해 방한한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을 단독으로 만나 파격 인센티브를 제시하며 공장 설립을 요청했다.

▶롯데가 미국에 31억달러 규모 공장을 짓자 트럼프 대통령이 신동빈 롯데 회장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트럼프는 면담 후 트위터에서 "(롯데가) 일자리 수천 개를 만들었다"면서 한국을 '훌륭한 파트너'라고 치켜세웠다. 며칠 전 "(한국은)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 나라"라고 했던 사람이 맞나 싶다. 국제 관계에서도 돈의 힘만큼 큰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업 투자가 이상해진 한·미 동맹에 훈풍을 불어넣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군(軍) 반대를 누르고 네덜란드 필립스와 LG의 합작 공장을 파주에 허가해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큰 외국 자본은 1개 사단보다 안보에 더 도움이 된다"면서 대우차 GM 매각 등 외국 자본을 대거 유치했다. 하지만 우리 대통령이 청와대로 외국 기업인을 불러 "대규모로 투자해줘 고맙다"고 하는 광경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됐다. 대신 우리 기업의 해외 투자만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우리 청년들 일자리는 어디서 생길까.


조선일보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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