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진의 영화를 맛보다] 저승사자도 무릎 꿇린 달콤짭짤한 이 한 스푼

송혜진 기자
입력 2019.05.14 03:01

'조 블랙의 사랑' 땅콩버터

결혼 7년 차인 친구가 갖은 마음고생 끝에 아기를 갖게 됐다고 문자를 보내왔을 때, 내 일처럼 기뻤다. 호들갑을 떨며 전화를 걸어 물었다. "뭐 먹고 싶니? 따뜻하고 비싼 밥을 사줄게." 친구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운 빵에 땅콩버터를 듬뿍 얹어서 먹고 싶어. 그동안 한약 먹느라고 좋아하던 빵을 통 못 먹었거든." 이날 저녁 우리는 카페에 앉아 우유와 토스트, 땅콩버터와 딸기잼을 함께 먹으며 기쁨을 나눴다. 땅콩버터를 혀끝으로 굴리며 친구는 "살 것 같네!"라고 외쳤던가. 그 모습을 보면서 1998년 개봉한 영화 '조 블랙의 사랑'을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했다.

영화 '조 블랙의 사랑'에서 저승사자 브래드 피트가 땅콩버터를 맛보는 장면(위). /조선일보 DB
땅콩버터가 이렇게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영화도 없을 것이다. 주인공 빌(앤서니 홉킨스)은 어느 날 낯선 남자(브래드 피트)와 마주친다. 그는 "나는 저승사자이고 당신을 데려가기 위해 나타났다"면서 "저승에 가기 전에 잠깐 이 남자의 몸을 빌려 당신 집에 머물면서 이승 구경 좀 해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죽는 날을 조금이라도 미룰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빌은 그를 '조 블랙'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한다. 인간으로 빙의한 조 블랙이 가장 먼저 탐닉한 것이 바로 땅콩버터였다. 우연히 땅콩버터 한 숟가락을 맛본 그는 수저를 입에서 쉽게 빼지 못한다. 나중엔 아예 수저를 핥기 시작한다. 달콤짭짤하면서도 기름지고 고소한 맛. 몸속 모든 세포를 건드리는 듯한 풍성한 맛에 그는 눈을 크게 뜬다. 침샘이 열리고 발가락 끝까지 간질거렸을 것이다. 저승사자 조 블랙은 한 큰술 땅콩버터를 맛보며 살아 있음의 희열을 체감했던 게 아닐까.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나타샤(스칼릿 조핸슨)가 슬픔에 잠겨 먹었던 것도 땅콩버터 샌드위치다. 나타샤는 그 샌드위치를 들고 울먹이지만, 이내 앤트맨(폴 러드)이 나타나 샌드위치를 낚아채며 말한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샌드위치를 먹어 치우고 이들은 다시 일어선다. 구원이란 어쩌면 대단한 데서만 얻어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무릎이 꺾이도록 낙담한 날에도 땅콩버터 한 큰술이면 기운이 솟을 테니까. '그래도 살 것 같다' 싶어질 테니까.


조선일보 A22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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