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상처받은 인물을 연기할 때 가장 빛난다

송혜진 기자
입력 2019.05.14 03:01

영화 '호텔 뭄바이'의 데브 파텔

"전 시크교도이고 제게 이 터번은 용기와 신념을 뜻합니다. 이걸 벗는 건 모욕이고 굴욕이에요. 그렇지만 손님께서 제 터번 때문에 계속 겁나고 두려우시다면 벗겠습니다. 벗을까요?" 영화 속 호텔 직원 아르준이 나직한 목소리로 묻자, 두려움에 떨던 손님도 침착을 되찾으며 대답한다. "아뇨, 괜찮아요."

2017년 영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는 모습. 파텔은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질문하며 삶을 바꿀 줄 아는 소시민의 모습을 연기해왔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8일 개봉한 '호텔 뭄바이'는 숨 쉴 틈조차 없는 긴장감으로 보는 이를 몰아넣는 영화다. 2008년 11월 인도 뭄바이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실제로 벌였던 무자비한 연쇄 테러 사건을 재현했다. 뭄바이의 특급 호텔 '타지'에까지 들이닥친 테러범들은 무차별하게 총격을 퍼붓고 폭탄을 던진다.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아수라장에서 아르준은 이성을 잃지 않고 탈출구를 찾아내는 인물. 영국 출신의 데브 파텔(29)이 아르준을 연기했다.

파텔은 전 세계를 울린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년)에서 주인공 소년 자말 역을 맡으며 화려하게 주목받은 그 배우.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2012년) '무한대를 본 남자'(2015년) '라이언'(2016년) 등을 거치며 평단의 사랑을 독차지해온 주인공이기도 하다.

◇위대한 소시민의 눈빛

데브 파텔은 인도 출신의 부모 아래 태어났지만 런던 근교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영국인이다. 2007년 드라마 '스킨스'로 데뷔했고, '트레인 스포팅'을 연출했던 대니 보일 감독이 그를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으로 발탁했다. 대니 보일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당시 "처음부터 위대해 보이는 사람보다는 차츰차츰 영웅을 닮아가는 얼굴을 찾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 '호텔 뭄바이'에서 아르준은 호텔 고객들을 구하려고 고군분투한다. /렌엔터테인먼트
데브 파텔이 그런 배우였다. 처진 눈꼬리는 소심해 보이고, 가녀린 체구는 왜소해 보인다. 그러나 데브 파텔은 기지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관객을 서서히 설득시킬 줄 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선 가진 것 없지만 슬기로운 인도 소년을, '무한대를 본 남자'에선 천재 수학자를, '라이언'에선 다섯 살 때 길을 잃고 호주로 입양됐지만 구글 어스로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내 결국 친부모와 재회하는 청년을 연기했다. 소극적인 듯하지만 능동적이고, 과묵하지만 질문을 통해 답을 찾을 줄 아는 인물이 그를 통해 완성돼온 것이다. 파텔 스스로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상처받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다."

◇한계를 기회로 만들 때

데브 파텔을 두고 일부에선 "서양인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인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라고 비판한다. 수학과 과학에 밝지만, 카스트 제도 같은 낡은 풍습에선 자유롭지 못한 인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파텔은 그러나 이를 무조건 거부하기보다 그 기회를 활용하는 쪽에 가깝다. "전형적이라고 인식되는 영역도 넓어지다 보면 전형성을 벗어나게 된다. 한때는 인도 배우에게 가난한 천민 역할만 시켰다. 발리우드 영화처럼 춤과 노래를 잘하는 연기만 시키기도 했다. 요즘은 화이트칼라부터 밑바닥 인생까지 연기할 수 있게 됐다." 인도 출신 배우가 연기해낼 수 있는 영역이 파텔을 통해 점점 더 넓어지고 있고, 그 스스로 이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한계를 기회로 만들어낸 것이다.


조선일보 A23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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