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증거에 기반한 정책 결정(EBPM)'이 포퓰리즘을 막는다

이석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입력 2019.05.14 03:13
이석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욕망은 흔히 퍼주기식 공약으로 표현되는 포퓰리즘 현상으로 귀결된다. 포퓰리즘은 일견 국민주권주의와 다수결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특별히 해가 될 것도 없는 현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단어 앞에 '자유'라는 형용사가 붙게 되면 포퓰리즘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개인의 기본권을 다수의 폭정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중요한 원칙이 민주주의 원리의 하나로 추가되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이 자유민주주의 시민의 기본권을 해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납부한 소중한 세금이 정책 실패로 인해 자칫 허공으로 날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은 정책 실패를 예방하고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영국을 비롯한 대다수 선진 국가들은 '증거에 기반한 정책 결정(Evidence-Based Policy Making·EBPM)'을 정부 운영의 중요한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다. 정부 정책은 그 효능과 부작용이 객관적으로 검증되기 전까지는 실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핵심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인 1997년 들어선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부는 EBPM의 원리를 '이념적 입장이 아니라 실용적 원칙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 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표방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영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국정 운영 원리로 지켜지고 있다.

원래 '증거에 기반한 정책 결정'이라는 용어는 훨씬 이전에 수립된 '증거에 기반한 의료행위(Evidence-Based Medicine ·EBM)'라는 원칙에서 비롯됐다.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의약품과 의술은 그 효능과 부작용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임신부 입덧을 방지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시판되었던 탈리도마이드라는 약이 팔다리가 없는 수천 명의 기형아를 낳게 하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 사건이 있었다. 이 '탈리도마이드의 비극'은 1962년 미 의회로 하여금 모든 의약품은 과학적 실험 방법에 의해 안전성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시판될 수 없게끔 강제하는 법률을 제정케 했다. EBM의 원칙이 공식적으로 법제화되는 순간이었다.

정책도 의약품과 마찬가지로 그 안전성이 객관적으로 검증되기 전까지는 그 부작용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아무도 모른다. 비록 인간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거나 기형아를 출산하게 하진 않는다 할지라도 국가 재정을 위태롭게 하고 납세자의 소중한 기본권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우려가 미국 정부로 하여금 과거 대대적인 복지제도 개혁을 추진하면서 1996년 연방 법률의 입법을 통해 연방 재원을 지원받는 주(州)정부의 모든 복지 개혁안은 정책 실험을 통해 효과를 검증해야 한다고 법으로 강제하게끔 한 이유이다.

이번 정부 들어 포퓰리즘 정책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소득 주도 성장, 최저임금 인상, 보편적 현금 수당과 같은 정책들도 어떤 치명적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지 사전에 객관적 검증을 통해 증거를 확인했더라면 상당한 사회적 비용과 갈등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일보 A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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