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62] 나팔꽃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입력 2019.05.13 03:08

나팔꽃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집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

―권대웅(1962~ )

나팔꽃 줄기가 창 아래까지 올라왔습니다. 오래지 않아 꽃을 맺을 겁니다. 마디마다 피어나던 꽃들 떠올려보니 가난하나 평화롭고 정답던 옛 골목길의 집들이 떠오릅니다. 길 따라 들어가며 대문 하나씩 있었습니다. 그 안쪽에 한 송이씩의 가정들이 저마다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감추며 지냈습니다.

신혼들은 으레 문간방에서 살림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구김 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드나드는 모두에게 삐걱이는 문을 열어주고 닫아주며 지냈습니다. 어느 봄날 아이가 생겨서 내려다보며 내외가 웃고 있습니다. 전 우주의, 하느님의 방문입니다. 모두 그 앞에서는 벅찬 마음이 됩니다. 미처 알 수 없던 최대의 희망이 '문간방'에 깃들었습니다. 지금은 없는 내 어머니도 좁고 미천하던 그 방에서 나를 낳아놓고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을 겁니다. 어버이날을 보내며 '저 나팔꽃 방 속'의 신비로운 침묵을 새겨봅니다.



조선일보 A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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