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푸조車 노동자의 선택

손진석 파리특파원
입력 2019.05.09 03:14
손진석 파리특파원

파리 시내에서 북쪽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샤를드골공항에 가까워지면 오른쪽으로 거대한 공터가 나타난다. 5년 전 푸조시트로앵그룹(PSA)이 폐쇄한 공장 자리다. 철거하다 중단한 공장 건물이 남아 있고 잡초가 우거져 황량하다. 주택 단지로 재개발을 앞둔 이 공장 터는 프랑스 자동차 산업의 쇠락을 상징한다. 2014년 이곳에서만 25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때를 전후해 PSA는 모두 1만1000여명을 내보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자동차 업계가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유독 프랑스 업체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노조 목소리가 큰 프랑스 대기업답게 해외 경쟁사들보다 고비용 구조였던 탓이다. 부활하려면 대규모 감원(減員)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PSA는 알고 있었다. 국내 생산을 줄이고 해외 생산을 늘려 비용을 줄이는 작업에 속도를 냈다. PSA는 2000년만 해도 전체 차량의 60%를 프랑스 본토에서 만들었다. 하지만 2017년에는 국내 생산 비중이 31%로 쪼그라들었다. 프랑스인의 일자리는 스페인·슬로바키아·브라질 사람들이 넘겨받았다.

태풍이 몰아친 이후 PSA 근로자들에게서 예전 같은 야성(野性)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프랑스 동부 소쇼에 있는 푸조 공장 근로자들은 올해 4·5월 네 번의 공휴일 중 노동절만 쉬고 나머지 세 번은 모두 일하기로 했다. 프랑스인들은 "그게 정말이냐"며 되묻고 있다. 대기업 생산직이 공휴일에 일하는 걸 상상하기 어려운 나라가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SUV 주문이 밀려들자 사측은 "임금 더 줄 테니 일하자"고 했고, 근로자들은 받아들였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1970년대 후반 4만명에 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7000여명만 남아 있다. 더이상 억센 노조 활동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걸 다들 안다.

'남아 있는 밥그릇'이라도 지키기 위해 PSA 근로자들은 한결 유연해졌다. 앞서 지난해에도 PSA 노조는 2200명을 추가 구조조정하는 데 동의했고, 동부 소도시 브줄의 푸조 공장에서는 프랑스 노동 문화를 상징하는 주 35시간제를 노사 합의로 없애고 '37시간45분 근무제'를 도입했다. 그때마다 노동단체들이 비난을 퍼부었지만 대다수 PSA 근로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PSA뿐 아니라 라이벌 르노그룹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2000년 59%에 이르던 르노의 국내 생산 비중은 2017년 18.7%까지 바짝 줄었다. 루마니아·모로코·터키로 생산라인을 대거 옮겼고, 노조는 예전보다 점잖은 행보를 하고 있다.

한국의 자동차 회사 노조원들은 프랑스 경쟁사들의 이런 변화를 모른 척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보다 경영 환경이 어려워지면 생존을 위해 한국의 자동차 업체들도 프랑스 회사들의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경고음은 이미 울리고 있다.



조선일보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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