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野性이 사라지는 한국 경제

김덕한 산업1부장
입력 2019.05.09 03:15

삼성전자 비메모리 투자에 '환심 사기'·'대형 특혜' 비난
미국보다 뒤지는 성장률보다 기업들 野性 잃어버린 게 더 심각

김덕한 산업1부장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에 13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하자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는 두 가지 부정적 반응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 환심 사기용 투자'라는 것과, '대형 특혜를 받기 위한 투자'라는 것이다.

'환심 사기'란 뇌물 공여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곧 있게 될 대법원 판결에서 선처를 받기 위한 투자라는 논리다. 지난해 2심에서 집행유예로 가까스로 풀려난 이 부회장이 대법원에서 다시 구속될지 모를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위한 '전략적 대응'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대해 연구개발(R&D) 자금의 30%, 시설투자의 5%를 세액공제해 주기로 하면서, 한국 1위 대기업인 삼성이 이 혜택을 받게 되는 데 대한 비판도 나온다. 133조원을 투자하는 삼성전자는 25조원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점만 부각될 뿐 대형 투자에 따르는 위험 부담과 도전 정신에 대한 찬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두 가지 부정적 시각을 결합해 바라보면, 이번 삼성전자의 투자 발표는 '총수의 죄를 면하기 위해 거액의 투자를 결정하고, 천문학적 세금 혜택까지 받는 부조리한 일'이 돼 버린다. 실제로 한 친여(親與) 성향 언론은, 삼성전자의 투자 발표 당일 문재인 대통령의 삼성전자 방문을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을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기업 투자를 이렇게 바라본다면 어느 기업이든 한국에서 투자하기 싫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대형 투자는 '정부가 나서서 기업인을 옥죄어 투자를 강요하고, 특혜까지 줘야 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나라에서 건강하고 활발한 투자가 일어나 기업 혁신을 이루고 경쟁력이 높아지는 선(善)순환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재인 정권 인사들은 다음과 같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133조원을 투자하지 않고 바로 국민들에게 나눠준다면 4인 가족 기준 우리나라 전 가구에 1000만원 넘는 돈이 돌아간다. 삼성이 받게 될 세금 혜택까지 나눠준다면 가구당 200만원이 추가로 돌아갈 수 있다.' 실제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당시 원내대표는 지난해 7월 "삼성이 20조원만 풀어도 200만명에게 1000만원을 더 줄 수 있다"고 했다.

10대 그룹 상장사들이 지난해 낸 법인세는 39조원에 달했다. 매출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벌어들여 국민 1인당 100만원 가까이 돌아갈 세금을 낸 이들 대기업이 모인 전경련은 청와대에 의해 '없어도 되는 집단'으로 치부된다.

지난 1분기 한국이 0.3% 마이너스 성장할 때 경제 규모가 12배나 큰 미국은 3.2%의 성장세를 이어갔다. 핵심 동력은 기업 투자다.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던 2016년 0.5%까지 정체됐던 미국의 기업 투자 증가율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인 2017년 5.3%, 지난해 6.9%까지 급성장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사설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새로운 규제에 대한 위협을 제거해 오랫동안 억압됐던 야성(野性)적 충동(animal spririt)을 일깨웠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35%였던 법인세를 21%로 낮추고 시정부-주정부-연방정부로 이어지는 중복 규제를 단순화한 것에 대해 시장이 '야성'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이 위험 부담을 감수하며 사업을 일으키는 것을 뜻하는 '야성적 충동'이 이제 겨우 3만달러 문턱에 올라선 우리보다 미국에서 더 크게 발현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한국이 최대 위기에 직면했음을 보여준다. 투자에 야유하는 우리 사회에서 야성을 일깨우는 건 더 어려워지고 있다.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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