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국내 정치에 이용한다"는 비판, 아베만 해당하나

임민혁 논설위원
입력 2019.05.08 03:15

韓 친일몰이, 日 우경화 폭주… 국내정치 이용으로 문제 커져
日은 극단적 조치까지 만지작… 양국관계 지금이 바닥 아니다

임민혁 논설위원
다음 달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때 개최국 일본은 중국·러시아와 양자 정상회담을 하기로 확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일 정상회담 개최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우리 정부가 물밑에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일본 측이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서 진전된 입장이 없으면 곤란하다"고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과 타협한 전(前) 정부 외교를 '적폐 1순위'로 매도한 문재인 정부가 일본 요구에 호응해 움직일 정치적 공간은 없다. 일본도 이를 잘 안다. 아베 총리는 김정은에게 "조건 없이 만나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내면서 문 대통령에 대해서는 사실상 "안 만나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만약 정상회담이 불발하면 양국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손가락질할 가능성이 높다.

한·일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보인다. 양국이 역사·영토 문제로 얼굴을 붉힌 건 한두 해가 아니지만, 어떻게든 정치·외교적 돌파구를 찾아 갈등을 봉합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의 우경화 폭주와 국내의 반일(反日) 포퓰리즘이 악순환을 일으키며 갈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일본 초계기가 우리 함정을 위협하고 이에 우리가 공격용 레이더를 조준했다는 진실 공방은 우방국 사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드론을 이용한 독도 해역 조사' 입찰 공고를 내자 일 외무성이 바로 강력히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실제 조사도 아니고 계획 단계부터 시비를 건 것은 작정하고 분란을 일으키겠다는 의도다.

문제는 지금이 양국 관계의 바닥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일본은 언론에 나온 '보복 조치' 외에도 다양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했다. 주한 대사관·총영사관 인근에 설치된 소녀상·강제징용 노동자상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갖고 가자는 의견도 나온다고 한다. 통상 ICJ는 한쪽이 응하지 않으면 재판이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외교 공관 보호를 규정한 '빈 협약'과 관련한 분쟁은 예외다. 일본이 이 문제를 ICJ에 제소하면 한·일이 법정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우리가 유리하다면 걱정할 게 없지만 그렇지도 않다. 정부는 2017년 말 외국 전문가에게 자문했는데 '일본 공관 앞 소녀상·노동자상 설치는 국제법 위반 소지가 크고, ICJ로 가면 패소 확률이 상당하다'는 답을 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과거 인권유린 문제가 다시 국제 이슈화될까 봐 그동안 'ICJ 카드'를 묻어뒀지만, 이제는 "갈 데까지 가보자"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일이 주요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건건이 국제 법정에 들고 간다면 어느 쪽이 승리하든 양국 관계는 만신창이가 된다.

최근 일본에 다녀온 학계 인사는 일본 측으로부터 "불법 체류자 일제 단속을 실시해 도쿄 유흥가에서 일하는 한국 여성들을 추방하면 한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으냐"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한국이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공격하지만, 정작 지금 한국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에 와서 웃음을 팔고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위협이다. 이쯤이면 정말 막장이다.

아직까지는 일각의 아이디어일 뿐이다. 하지만 실행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는 것 자체가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문제를 풀어야 할 양국 정치권이 오히려 '혐한 분위기 조성' '친일 몰이'에 앞장서고 있으니 관계 개선은 더욱 요원해 보인다. 문 대통령은 최근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자꾸 국내 정치에 이용하면서 문제를 증폭시킨다"고 비판했다. 맞는 말이다. 다만 자신에게도 해당 사항이 없는지 돌이켜보길 바란다.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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