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치즈 공방, 참기름 공장, 소시지 정육점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입력 2019.04.26 10:28
외곽으로 밀려났던 식품제조시설, 새로운 모습으로 도심 컴백
"학력 위주에서 노동의 가치 인정하는 변환기 맞은 한국사회 반영"

서울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성수연방’을 찾은 여성들이 돼지고기 분할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육류가공업체 존쿡 델리미트가 성수연방에 마련한 ‘팜프레시 팩토리’에서는 육류제품의 생산과 소비 전 과정을 체험할 수 있다./김성윤 기자
#1: 주말을 맞아 봄 나들이 나온 하늘하늘한 드레스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유리창 안을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본다. 이곳은 서울 한복판 성수동에서도 요즘 가장 ‘핫’하다는 복합문화공간 ‘성수연방’. 세련된 카페와 편집숍, 레스토랑, 책방 사이 정육점 겸 육가공품 제조공장 ‘팜프레시 팩토리’가 있다. 유리창 안에서는 돼지를 부위별로 나누고 뼈를 발라내는 분할·발골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옆에서는 양·돼지 창자에 간 고기를 채워 소시지 만들기가 한창이다.

#2: 서울 동대문 인근 광희동에 들통(버킷)을 겹겹이 쌓은 듯 독특한 모양의 건축물이 들어섰다. 프리미엄 참기름·들기름 제조업체 ‘쿠엔즈버킷’이 만든 동대문 도심 공장 겸 플래그숍이다. 쿠엔즈버킷 박정용 대표가 갓 짜낸 참기름을 종이컵에 담아 건넸다 아직 정제하지 않은 참기름은 곰탕처럼 뽀얗고 따뜻했다. 박 대표가 "맛보라"고 권했다. 참기름 특유의 고소함에 구수함이 더해져 깊고 진한 맛이 났다. 새벽 산 정상 부근에서 아주머니들이 타주는 들깨차의 고급 버전이랄까. 박 대표는 "이게 옛날 방앗간에서 팔던 참기름 맛"이라고 했다.

#3: 서울 한남동 ‘치즈플로’는 치즈 공방 겸 레스토랑이다. 손님들이 식사하는 테이블 뒤로 치즈를 생산·숙성하는 작업장이 있다. 이곳 오너셰프 조장현 대표가 직접 만든 치즈 15가지가 전시된 진열대에서 모차렐라 치즈를 꺼내 맛 보여줬다. 부드럽고 고소하고 신선하다. 모차렐라는 만들어서 바로 먹어야 맛있는 치즈. 조 대표는 "모차렐라 같은 ‘프레시 치즈(fresh cheese)’를 제대로 맛보여드릴 때 도심형 치즈공방을 운영하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쿠엔즈버킷 동대문 도심형 오일 팩토리. 참기름 들통을 쌓아올린 모양으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기름 제조 공정을 형상화했다. 2층과 3층에서 갓 짜낸 참기름과 들기름을 1층 매장 겸 카페에서 맛보고 구매할 수 있다./김성윤 기자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던 식품 제조시설들이 속속 도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햄·소시지 등 육가공품 제조업체인 ‘존쿡 델리미트’가 지난 12일 성수연방에 팜프레시 팩토리를 열었고, 현대적 방앗간이랄 쿠앤즈버킷 동대문 도심 공장은 지난 4일 오픈했다. 치즈플로는 2016년부터 한남동에서 치즈 생산을 시작했다.

땅값 비싼 도심에 제조시설을 마련하고 운영하는 가장 직접적인 목적은 홍보일 듯하다. 치즈플로 조장현 대표는 "도심형 공장은 브랜드를 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다.

"생산설비가 있으니 관심과 이목이 집중됩니다. 지방에 치즈공장 만든다고 누가 찾아오나요? 손님들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인 도심에서 생산해서 치즈를 아직 낯설어하는 국내 소비자들에게 알린다는 목적이었습니다." 조 대표의 홍보전략은 먹혀들어간 듯하다. 그는 "사람들이 직접 만든 치즈를 신선하게 먹을 수 있다는 걸 무척 신기해하고 관심 갖더라"고 했다.

서울 한남동 ‘치즈플로’ 조장현 대표가 매장 내 오픈형 공방에서 치즈를 만들고(왼쪽) 저장고에서 숙성되고 있는 치즈를 돌보고 있다./김성윤 기자
팜프레시 팩토리를 맡고있는 존쿡 델리미트 개발팀 박한서 팀장은 "소비자 신뢰와 투명성 확보를 위해서"라고 했다. 국내에는 ‘소시지는 좋지 않은 싸구려 부위로 만든다’거나 ‘육가공품은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 깨기 위해서 팜프레시 팩토리에서는 신선육 손질과 성형, 양념, 훈연 등 육제품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소비자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한다.

쿠엔즈버킷 박 대표는 "지방은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이 있지만, 건강한 지방을 제대로 소비하면 노인성 치매를 예방하고 피부노화 방지 등 몸에 좋은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쿠엔즈버킷 박정용 대표가 갓 짜낸 참기름을 들어보였다. 정제하지 않은 참기름은 기름과 깻묵이 섞여 들깨차처럼 묵직하고 구수했다./김성윤 기자
소비가 이뤄지는 현장에서 생산해야만 본연의 맛과 영양을 체험하고 섭취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쿠엔즈버킷 박 대표는 "과거 방앗간 참기름은 정제하지 않고 팔았다"고 했다. "깻묵이 차츰 가라앉으면서 위에 뜨는 기름을 사용했죠. 옛날에는 전을 참기름에 지지다가 깨묵을 조금 떠서 기름과 섞어 지지기도 했어요. 그러면 훨씬 고소했죠. 원거리에서 생산하는 참기름은 유통기한을 확보하기 위해 정제할 수밖에 없어요. 보존성은 높아지지만 리그난, 오메가3 등 참기름·들기름에 들어있는 유익한 성분이 함께 걸러진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박 대표는 오는 5월부터 동대문에서 정제하지 않는 ‘크루드(crude) 참기름’을 판매할 예정이다. 존쿡 델리미트는 갓 만든 소시지, 햄, 드라이에이징한 스테이크를 성수연방 1층 레스토랑에서 판매한다.

도심형 공장은 제대로 먹는 방법과 활용법을 알려주는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한다. 치즈플로에서는 치즈를 맛보며 배우는 클래스가 꾸준히 열린다. 팜프레시 팩토리에는 소비자가 직접 고른 고기와 양념으로 원하는 소시지 3개(250g)를 1만원에 만들어주는 ‘마이 소시지’ 서비스가 있다. 소시지를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 클래스’는 5월부터 운영된다.

존쿡 델리미트가 성수연방에 오픈한 ‘팜 프레시 팩토리’. 드라이에이징을 위한 소고기 숙성실과 소시지 작업장 등 육류 가공품 제조설비가 판매장, 레스토랑과 함께 있다./김성윤 기자
쿠엔즈버킷은 1층 카페에서 참기름·들기름 제품과 함께 참깨·기름·깻묵 등 부산물을 활용한 비스킷·케이크·샌드위치 등을 판매할 계획이다. 동대문 공장 4층 베이커리에서 메뉴 개발을 맡고 있는 쿠엔즈버킷 김은희 파트장은 "깻묵으로 만든 ‘참깨버터’는 땅콩버터와 맛이 비슷하다"며 "알레르기 때문에 땅콩버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될 것"이라고 했다.

건축가 이성란 이건축연구소 소장은 "우리 사회가 학력 위주에서 노동의 가치를 알아주는 쪽으로 변환기를 맞았고, 이에따라 장인정신이나 크래프트맥십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듯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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