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바나나 우유의 힘

안소정 '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 저자
입력 2019.04.26 03:03
안소정 '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 저자
생각해보면 내가 목욕 마니아가 된 데는 조기 교육의 힘이 컸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의 단골 나들이 장소는 집 근처 온천이었다. 고된 목욕재계를 마치고, 노점에서 어묵이며 계란을 먹는 쏠쏠한 재미를 이미 그 시절에 배웠다. 물론 다른 것들도 익혔다. 탕에서는 헤엄을 치지 말고, 주변에 물을 튀기지 말 것. 사람이라면 자기 몸은 스스로 씻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자리를 찾아 헤매는 이를 보면 이렇게 말을 건넬 것. "저, 곧 나가요."

그랬던 내가 이제는 어른이 되어 아이와 목욕하러 간다. 지난 주말에는 친구의 딸과 목욕탕에 다녀왔다. 아니나 다를까. 다섯 살짜리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한참이나 씻기를 거부하는 아이를 붙잡고 설득하던 때 불쑥 손 하나가 들어왔다. "할매가 줄 거는 없꼬, 자, 하나 무라. 단 거 묵으면 힘이 난다." 할머니가 건넨 건 바나나 우유였다. 아이는 우유를 덥석 쥐었고, 친구와 나는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얘기했다. "애들이 다 그렇다."

"맛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협상을 시도했다. "할머니 말씀 들었지? 먹고 힘내서 씻자." 아이는 정말로 얌전하게 몸을 맡겨왔다. 꾹 참고 때를 미는 아이, 어느새 엄마가 되어 고군분투하는 친구, 그리고 흐뭇하게 지켜보는 할머니. 거울 너머 풍경이 한 폭의 다정한 그림 같았다.

목욕탕 인생 30년, 내게도 있었을 수많은 바나나 우유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천방지축 어린이가 어엿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던 건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 준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목욕을 마치고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 또 목욕하러 올까?" 아이가 힘차게 대답한다. "응, 또 우유 먹을래!" 다음번 우유는 내가 준비해야겠다.



조선일보 A23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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