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국민연금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입력 2019.04.22 03:17

국민연금 기금 자산 규모 최고치 도달 후 절벽처럼 감소
정부로부터 독립과 전문성 등 '필요한 개혁' 더 늦출 수 없는데
대통령·장관, 민간 개입 위해 '믿음직한 칼'로 휘둘러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지난 3월 재정학회는 보기 드문 긴장감이 감돌았다. 국민연금 개혁안이 전체 토론의 주제였는데 연금 전문가뿐 아니라 금융 전문가와 거시 전문가까지 참여하도록 기획됐다. 이들은 그간 주로 연금 재정과 세대 간 형평에 국한됐던 논의 범위를 국민 경제로 넓힐 경우 얼마나 고민이 더 깊어지는지를 찬찬히 발표했다.

국민연금 기금의 자산 규모는 포물선 형태로 상정되어 왔다. 2041년에 최대 규모에 도달한 후, 늘어나는 고령 인구의 연금 급여를 지불하기 위해 약 16년에 걸쳐 자산을 매각해가며 쪼그라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금융 관련 이슈를 발표한 교수가 토로한 근심은 이런 포물선 형태를 무작정 전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봉우리를 일단 지나면 GDP 절반에 달하는 막대한 자산을 급속도로 팔아치워야 한다는 것을 국내외 모두가 아는데, 그러니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이 뻔한데 어느 누가 이전 가격으로 매입하려 할까? 즉 지금 시점에서 바라본 자산 가치에 기반해 고갈 시점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이다. 결국 포물선이 아니라 절벽에 가까운 모양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데, 이것이 전체 금융 시장과 개인의 자산 가치, 연금제도를 어떤 위험에 노출시키게 될지 제발 생각을 해보라는 호소였다. 충격을 피해 대부분을 해외에 투자한다 해도 급속도의 자산 매각이 외환시장을 통해 국가 경제에 미칠 영향 역시 심각한 걱정거리다. 그는 우리 사회가 극단적으로 아둔하지 않은 이상 필요한 개혁이 늦기 전에 이루어질 것이라 믿고 근심을 미뤄뒀었는데, 이제는 정말 암담할 정도로 걱정이 된다고 털어놨다.

필요한 개혁이란 무엇일까. 1차적으로는 자산 고갈 위험을 없애는 연금개혁이다. 그러나 이 경우 기울기는 완만해지겠지만 고령화로 인한 연금 자산의 대폭적 변화는 여전히 피하기 어렵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수준의 운용 능력을 갖추고 금융 환경과 연금 자산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게 하는 기금운용 지배 구조가 필수다. 즉, 연금 운용 지배 구조 개혁은 연금제도 개혁과 함께 두 개의 축을 구성한다.

모범 사례로 꼽히는 캐나다는 고령화로 기금 고갈이 예측되자마자 신속하게 근본적 개혁을 단행했다. 한편으로는 보험료를 크게 올리고, 다른 한편으로 기금 운용 지배 구조를 완전히 바꿨다. 전 세계 연·기금 운용 지배 구조의 교과서가 된 이 개혁의 핵심은 독립성과 전문성이다. 여기서의 독립이란 정부로부터의 독립이다. 다양한 정책 목표를 가진 정부가 연금 가치 보호를 최우선하지 않을 것이 뻔한 이상, 기금 운용에 관해서는 정부 영향력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6년 캐나다는 기금 운용위원회의 당연직을 완전히 배제하고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로 '독립적'인 지배 구조를 구축했다.

대조되는 참고 사례는 미국의 고령 연금(OASI)이다. OASI의 최고 결정 기구는 당연직 공무원이 주축이다. 단, 기금 운용도 없다. 적립금은 거래 불가능한 정부 채권으로만 보유한다. 자본시장이 고도로 발달한 미국에서 이상한 일이다. 1999년 의회 증언에서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은 정부 압력에 좌우되지 않고 가입자의 이해를 추구하는 지배 구조의 설계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왜곡을 피하려면 아예 운용을 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 사례들의 함의는 뚜렷하다. 기금을 적극 운용하려는 경우에는 정부가 다른 목적으로 연금에 영향력을 미치지 않도록 독립성과 전문성을 철저히 준수해야 하는 반면, 그게 자신 없다면 정부의 손을 원천적으로 묶어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방식은 다를지언정 정부 영향을 차단하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정부의 진정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얘기다.

지금 국민연금 기금 운용의 최고 결정기구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에 정부 당연직이 20명 중 6명이다. (노사 추천 전문가도 아닌) 노조와 사용자 대표가 6명, 자산운용 전문가는 없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독립성과 전문성은 방해가 되니 최대한 멀리 치워버리겠다는 것과 같다. 그간 이에 대한 개혁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위기가 가까워진 지금 오히려 더 요원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부터 장관까지 대기업의 위법을 국민연금으로 다스리겠다며 국민연금을 당당히 수단시하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사례처럼 민간기업 지배구조에 적극 개입하려 하니 국민연금의 후진적 지배 구조는 개혁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호쾌하게 휘두를 수 있는 믿음직한 칼이다. 남의 눈의 티를 잡기 위해 제 눈 안의 들보는 안 본 척하는 셈이다. 정작 국민연금은 절체절명의 위기인데 말이다.


조선일보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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