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그윽한 참나무 불로 구운 꽃등심… 겉은 초콜릿 빛, 속은 연지곤지 분홍 빛

정동현
입력 2019.04.19 16:40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스테이크편
서울 청담동 '더미트퀴진'

스테이크는 단순한 음식이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 사람들이 스테이크, 그러니까 불에 구운 고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음식의 형태가 인류의 기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인 듯 싶다.

리처드 랭엄 미 하버드대 교수는 '요리본능'이란 책에서 인류가 불로 요리를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진화가 이루어졌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간단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우리 조상들이 먹은 최초의 '요리'는 산불에 타 죽은 짐승 정도가 아니었을까? 사람 대신 인공지능이 자동차를 운전할 거라는 21세기에 이르러 미식 트렌드는 원초적인 방법으로 회귀하는 중이다. 고기를 냉장고에 걸어놓고 숙성시키는 것은 기본이다. 가스나 전기가 아닌 나무를 써서 원시 시대의 맛과 향을 재현해 내는 게 포인트다. 물론 나무를 쓰게 되면 화력을 통제하기 어렵다. 나무를 조달하고 쌓아놓는 것도 다 돈이요 시간이요 공간이다. 그럼에도 사람의 입맛을 끄는 뭔가가 있다.

작년 리뉴얼 후 새롭게 문을 연 서울 반포JW메리어트호텔의 '더 마고 그릴'은 이른바 '우드 파이어 그릴(Wood Fire Grill)을 표방한다. 나무로 고기를 굽는다는 뜻이다. 높은 천장으로 마감된 이 레스토랑은 들어서자마자 옅은 숯 냄새가 몸에 밴다. 안쪽에 들어가면 벽난로라도 있을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이다. 영국에서 온 요리사는 큰 키에 딱 벌어진 어깨로 벌건 고기를 만진다. 경남 하동산(産) 한우가 가스불 온도를 가볍게 초과하는 뜨거운 열 앞에서 순식간에 짙은 갈색으로 익어버린다.

손님의 손짓 하나에도 빠르게 움직이는 서비스를 받으며 먹는 스테이크에는 어떤 오차도 없다. 흰 옷을 입고 요리사들은 작두를 타듯 이글거리는 불 앞에서 찰나에 고기를 뒤집고 로켓을 쏘아 올릴 듯한 정확한 타이밍에 고기를 내놓는다. 바삭거리는 표면에는 참나무 향이 나고 자두처럼 빨간 속살은 얌전히 입 속에서 부서진다. 요리의 흐름을 느끼고 싶다면 계절마다 바뀌는 코스 요리를, 고기에 집중하고 싶다면 그램 단위로 한우·미국산을 구별해 파는 스테이크 메뉴를 고르는 편이 낫다.

서울 청담동 '더미트퀴진'(왼쪽 사진)은 원초적인 불길과 숙련된 기술이 어우러진 스테이크(오른쪽 사진)를 낸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러나 이 집의 핵심은 지정된 목장에서 받는 소고기. 선명한 붉은색과 고르게 박힌 흰 마블링이 아름답게 대비되는 꽃등심은 보기만 해도 그 맛을 짐작할 수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코스 요리의 압박에서 벗어나 구도하는 심정으로 '오직 고기'만을 외치고 싶다면 청담동에 새로 생긴 '더미트퀴진'에 가야 한다. 학동사거리에서 청담사거리로 올라가는 방향, 신축 건물 2층에 들어선 이곳은 이름부터가 고기에 올인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팬케이크와 소시지 등을 조합해 파는 런치 메뉴도 있지만 역시 불을 피워 고기를 먹기엔 저녁이 딱이다. 프랑스식 육회인 '한우타르타르', 로메인 상추를 그릴에 구워 올린 '그릴드 시저샐러드', 푸릇한 심이 살아있는 '아스파라거스 튀김' 같은 부요리를 먼저 주문한 뒤 숨을 고르며 메뉴판을 살펴보는 게 순서다. 마블링이 조밀하게 박힌 채끝, 소의 부위 중 가장 부드러운 안심도 좋지만 영어로는 립아이(Rib-eye)라 부르는 꽃등심을 빼놓고는 스테이크를 논하기 어렵다. 경기도 이천 설성면에서 올라온 한우 등심의 제일 가운데 부분인 꽃등심은 살이 연한 것은 기본, 마블링이 고르고 고기의 부분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

1000도까지 올라가는 참나무 불에서 구운 꽃등심은 초콜릿 빛으로 익혀져 나온다. 그 속을 보면 지층처럼 색이 나뉘고 맨 안쪽은 연지곤지 분홍색에 가깝다. 고기 위에 올라간 다시마 버터는 녹으며 감칠맛을 흘려 보내고 고기는 버터의 유지방을 만나 더욱 반짝거린다. 크게 자른 고기를 입에 넣으면 '해가 뜨면 눈을 뜨고 해가 지면 눈을 감던 시절'의 향기가 난다. 불에 익힌 고기 한 점에 눈에 생기가 돌고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고기를 나눠 먹으며 우정을 다지고 사랑을 증명하던 원시 시대가 서서히 끓어오른다.
조선일보 B6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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