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또 오겠냐" 빡빡했던 일정 → "또 오면 되지" 덜어내는 여행으로

김미리 기자 이영빈 기자
입력 2019.04.20 03:00 수정 2019.04.20 12:05

[아무튼, 주말]
여행자유화 30년… 달라진 풍속도

일러스트=안병현
#1. 무역업을 하는 주계환(65·태평양자원무역 대표)씨는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낸다. 해외여행이라면 이력이 났지만 1985년 첫 해외 출장만큼은 생생하다. "인도 뉴델리로 가는데 몇 주 동안 신원 조회해서 겨우 여권이 나왔어요. 자유총연맹에서 소양 교육까지 받았죠. 강사가 '국가대표로 나가는 거니 나라 망신시키지 마라, 침 뱉지 마라, 담배꽁초 버리지 마라'고 신신당부했죠." 김포공항 국제청사 입국장엔 개선장군 맞이하듯 가족을 보러 온 이들이 가득했다.

#2. '봉파파'로 알려진 반려견 블로거 소규성(39)씨는 지난 2월 필리핀 마닐라와 수비크로 4박5일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가족'엔 아내, 25개월 아들 말고 비숑 프리제 두 마리도 포함됐다. 반려견 동반 여행은 2016년 태국 푸껫, 작년 베트남 다낭에 이어 세 번째. "아이보다 더 오래 같이 살았는데 어떻게 떼놓고 저희만 쏙 가겠어요. 반려동물 입국 불가인 나라는 아예 여행 대상지에서 제외해요."

문화 시민 교육을 받아야 여권을 받을 수 있었던 1980년대, 반려견까지 데리고 가는 2019년. 30여 년 새 해외여행 풍경은 이만큼 바뀌었다. 올해는 1989년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된 지 만 30년이 되는 해. 경제처럼 압축 성장한 한국인의 해외여행을 살펴봤다.

30년 만에 2870만명 해외로

1970년대 해외여행 계도 영상의 한 장면. / 국가기록원 영상 캡처
한국은 세계에서 아홉째로 해외여행에 돈을 많이 쓰는 나라(UN 세계관광기구 통계 기준, 2017년 관광 지출 규모 306억달러)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발간한 '2018 숫자로 보는 한국 관광'에 따르면 2018년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 수는 연인원 2870만명. 1989년 121만명에서 24배 가까이 늘었다. 한국관광공사 '2018년 아웃바운드 현황 조사' 결과, 한 해 평균 여행 횟수는 2.8회, 평균 여행 기간은 6.1일이었다.

해외여행을 처음 가는 나이도 낮아졌다. '아무튼, 주말'이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10~60대 남녀 1807명에게 '해외여행을 처음 한 나이'를 물었다. '9세 이하'라고 답한 10대 응답자는 23.3%. 반면 20대는 5%, 30대 1.3%, 40대 0.7%, 50대 0%, 60대 0.7%에 그쳤다.

초반엔 동남아 저가 패키지 '깃발족'이 휩쓸었지만 이젠 유럽에서도 물가 비싼 나라로 꼽히는 스위스의 단골 여행객이 한국인이다. 스위스 관광청에 따르면 2017년 '스위스 트래블 패스(통합 교통 패스)'를 이용한 해외 관광객 중 1위가 한국이었다.

지금은 일상이지만 아무나 여행 갈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관광 목적 해외여행이 제한적으로 풀린 시기는 1983년. 50세 이상 성인이 200만원을 1년간 예치하는 조건으로 관광 여권을 발급해 줬다. 이후 연령대를 조금씩 낮추다 1989년 연령 제한 없이 전면 자유화가 시행됐다. 1992년까진 관광교육원, 자유총연맹 등에서 하루짜리 소양교육을 받아야 여권이 나왔다.

이연택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 붕괴, 동유럽 개방 등 전 세계적인 개방 물결에 한국도 해외여행 규제를 풀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동서 화합을 강조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이 교수는 "1980년대 이전 소수 특권층만 갈 수 있었던 '엘리트 투어리즘' 시대, 1990~2000년대 배낭여행과 패키지로 대변되는 '대중 투어리즘' 시대, 2010년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 투어리즘' 시대로 진화했다"고 했다.

대학생 배낭족에서 모바일 실버족으로

여행 자유화의 혜택을 만끽한 첫 세대는 1990년대 대학생 배낭족. "1990년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한 달 반 유럽 배낭여행을 했어요. 서울에서 런던으로 가는데 도쿄, 모스크바를 거쳐 36시간 만에 갔어요. 기내식만 6번. 비행기 타는 게 귀하던 시절이라 그땐 그게 본전 뽑는 거라 생각했어요." 1990년 배낭여행 동호회 '세계로 가는 기차'를 만든 정진원(52) 노랑풍선 전무는 "극기 훈련 하듯 다녔다"며 웃었다.

체중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30~40일 유럽을 돌았다. 유로화 출범 이전이라 프랑스 프랑, 독일 마르크, 이탈리아 리라 등 각국 통화와 여행자 수표를 넣은 전대를 허리춤에 차고 돌아다녔다. "일본 책을 번역한 여행서 '세계를 간다'를 끼고 갔는데 틀린 정보가 많았어요. 배낭족들이 '세계를 헤맨다'로 부를 정도였죠." 정보 갈증을 해소하려 동호회를 만들었다. 회원들이 슬라이드 사진 찍어 와서 배낭여행 설명회를 열었다. 천리안, 하이텔 등 PC 통신으로도 정보를 공유했다.

'발품'과 '구전(口傳)'으로 십시일반 정보를 그러모았던 아날로그 여행은 이제 갔다. 스마트폰 하나면 실시간 여행 정보가 업데이트되는 세상. 관광공사 설문에서 여행자 87.6%가 해외여행 때 모바일 인터넷을 쓴다고 답했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체력에 디지털 사용 능력까지 갖춘 '한국형 영 식스티(젊은 60대)'의 스마트 여행은 눈에 띈다.

"1980~90년대 패키지 여행하면서 점 찍듯 6~7개국 도시를 돌아다녔는데 남는 게 거의 없더군요. 내가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어 자유여행에 도전했다가 그 맛에 빠졌습니다. 가슴 떨릴 때까지는 다니려고요. 다리 떨리면 못 가니까." 김남성(63)씨는 8년 전 공직에서 은퇴한 뒤 해외여행 마니아가 됐다. 작년 추석 때는 친구 부부 12명과 렌터카로 스위스를 12일간 여행했다.

20대 못지않은 '스마트 여행족'. 항공권 가격 비교 앱 '스카이스캐너'로 항공권을 검색하고, '부킹닷컴' '아고다'에서 숙소를 예약한다. 현지에서 길을 찾고 대화할 땐 구글맵과 구글 번역기를 쓴다. 영수증은 바로 사진 찍어 메모 프로그램 '에버노트'에 저장한 뒤 나중에 일행과 정산한다.

캠퍼밴(캠핑용 차)을 빌려 뉴질랜드도 여행한 적 있는 김씨는 "60대 이상은 체력적으로 이동하기가 어려우니 자동차 여행이 좋다. 6~12명 정도 같이 가니 경비도 줄어든다"고 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국제운전면허증 발급 건수는 2012년 20만2000여 건에서 2017년 79만6000여 건으로 급증했다. 김씨는 "해외는 오토 차량이 별로 없어 일찍 예약해야 하고, 중장년층은 컨디션을 보고 일정 조정할 때가 잦아 '취소 수수료'가 없는 숙소로 잡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짧고 굵게 자주

여행 팟캐스트 '거기 어때' 운영자인 정다영(37)씨는 "'길게 한꺼번에 여러 나라'로 가는 '일주 여행'에서 '짧게 자주 한 나라만' 보는 '미니 여행'으로 패턴이 바뀌었다"고 했다. "저비용 항공이 많아져 성수기·비수기 구분이 없어지고 자유여행 플랫폼 덕에 가성비 좋은 여행을 수시로 고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규모 그룹 형태의 '취향 공동체 여행'도 새 트렌드. 정씨는 "특정 지역을 여러 번 여행한 사람이 개인 자격으로 그 지역으로 같이 여행 갈 사람을 모아 가는 형태"라며 "자기소개서를 제출받아 선발하기도 한다"고 했다.

수개월 전부터 계획하는 게 아니라 저렴한 항공권이 나오면 떠나는 '즉행족(즉흥적으로 여행하는 족)'도 늘어나는 추세. '무계획 여행'이다. 온라인 여행 플랫폼 마이리얼트립 이동건(33) 대표는 "우리 사이트에서 예약한 현지 체험 여행 중 30% 정도가 체험 시작 48시간 전 현지에서 예약한 것"이라며 "과거엔 빡빡하게 채워놓고 떠났지만 요즘은 일정을 유동적으로 잡고 현지에서 스케줄 잡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4~5년 새 늘어난 것이 현지 '액티비티' 투어. 로마 여행이 아니라 '로마 가정식 쿠킹 클래스', 런던 여행이 아니라 '런던에서 즐기는 소규모 잉어 낚시 체험' 식으로 도시의 표피에 머물던 관광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간다. 관심 사항 맞춰 한다고 해 'DIY 여행'이라고도 한다. 액티비티 예약 서비스 업체인 '야나트립' 조연아(45) 대표는 "4~5년 전 해외여행 가서 외국 친구들이 다국적으로 체험 여행 하는 걸 보고 신기해했었다. 그 트렌드가 들어온 것"이라며 "20대뿐만 아니라 가족 단위로 사막 투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30년 전 우리는 '언제 또 오겠느냐'면서 하나라도 더 보려고 일정을 채웠어요. 하지만 대학생 딸이 여행하는 걸 보니 '또 오면 되지' 하면서 일정을 덜더라고요. 우리 땐 '플러스 여행', 요즘은 '마이너스 여행'이랄까요." 정진원 노랑풍선 전무 얘기다.

고열량 식단처럼 질보다 양을 우선으로 꽉꽉 채우던 여행이 간소한 고단백 영양식으로 바뀌었다. 여백(餘白) 있는 여행. 30년 여정 끝에 한국인의 해외여행이 도착한 지점의 풍경이다.

◆ "함께 여행하세요"… 10년 전엔 어린이, 지금은 반려동물 서비스 공들이는 항공사

[아무튼, 주말] 공항도 반려견을 홍보대사로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2월 소규성씨는 반려견 두 마리를 데리고 필리핀 마닐라로 여행을 갔다. 25개월 아이가 탄 유모차 뒤에 실린 강아지들이 빼꼼 고개 내밀었다. / 소규성

"두고 가지 마세요. 함께 해외여행하세요."

여권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완곡하게 담은 표어가 아니다. '두고' 앞에 생략된 목적어는 여권이 아니라 반려동물. '반려동물 동반 해외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플랫폼 '펫트래블(petravel)'이 내건 카피다.

반려동물 인구 1000만 시대, 강아지·고양이·새도 주인 따라 해외여행 간다. 사람도 해외로 나가기 어렵던 30년 전과는 천양지차. 반려동물 운송 건수도 급증했다. 대한항공은 2015년 2만353건에서 2018년 2만7695건으로, 아시아나항공은 같은 기간 1만4025건에서 2만6838건으로 늘었다.

10여년 전 가족 여행자를 겨냥해 어린이 동반 여행 친화도를 내세웠던 항공사와 공항이 이젠 '반려동물 여행족'을 향해 반려동물 여행 친화 서비스를 강조한다. 2년 전 인천공항이 스타 반려견 '달리'를 홍보대사로 임명했을 정도. 지난 2월엔 유튜브에 '달리, 일등석 타고 뉴욕에 가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려 반려견 동반 여행 과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엔 '댕댕트립(멍멍이와 함께 하는 여행)' '애견 동반 여행'이라는 해시태그를 단 사진이 수두룩하다. 네이버 블로그 '플라이댕댕 해외여행' 등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도 꽤 된다.

항공사마다 동반 규정은 다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무게가 7㎏(케이지 포함) 이하면 기내 반입할 수 있고, 이 무게를 초과하면 위탁 수하물로 보내야 한다. 운임은 한국~미국 노선이 편도 20만원이다.

'펫트래블' 류완석 대표는 "국가별 검역 요구 사항 확인→마이크로칩 이식→광견병 예방 접종 및 검사→건강증명서 발급→ 수입허가서 발급→항공사 운송 승인 받기→검역 서류 준비→공항 검역소에서 검역증명서 발급→반려동물 수속 순서를 일반적으로 거친다"고 말했다. 류 대표는 "검역 기준이 우리와 비슷한 베트남·EU 국가·캐나다가 동반 여행하기 편한 나라로, 호주·일본·영국은 까다로운 나라로 꼽힌다"고 했다.

조선일보 B3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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