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기로 한 땀 한 땀… 낚싯줄에 물감 찍는 남자

정상혁 기자
입력 2019.04.19 03:51

조선일보미술관, 김태혁 초대전

화가 김태혁(54)씨는 낚싯줄 위에 그림을 그린다. 정확히는, 물감을 낚싯줄에 얹어 띄운다. "전통적으로 그림은 물감을 평면에 바르는 수평 운동이다. 그 반대의 수직 운동을 시도하다 이윽고 '공중에 띄워보자' 마음먹게 됐다." 방법을 고심하며 3년 넘게 골치를 썩였다. "담배 피우러 밖에 나갔다가 거미줄 위에 담뱃재가 걸려있는 걸 봤다. 바로 이거다!" 이후 낚싯줄을 거미줄 삼아 투명의 선을 만들고, 그 위에 의료용 주사기로 물감을 한 땀, 한 땀 올리고 있다.

서울 군자동 작업실의 김태혁 화가가 낚싯줄 위에 주사기로 물감을 올리고 있다. /김지호 기자

서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19일부터 이달 28일까지 김태혁 초대전이 열린다. 2014년부터 시작한 'Off' 시리즈 등 신작 30여 점을 선보인다. 격자로 엮은 낚싯줄 위에 점(點)을 찍거나, 선(線)을 긋고, 여백을 메워 면(面)으로 나아간다. "우주 만물이 점에서 시작한다. 점→선→면의 진화 과정과 순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세계의 불안정성을 나타내기 위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작업한다." 공중 부양하는 물감, 작품 대부분 단색(單色)이다. "관람객이 컬러보다 작품 메시지에 집중했으면 했다." 다만 검은 물감으로 낚싯줄 사이사이를 채워 면을 표현한 'Off―P' 시리즈의 경우 널어놓은 '김'처럼 보일 수도 있다. 김씨는 "나도 그 생각 했다"며 웃었다.

1990년 중앙대 서양화과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13년간 판화를 했다. "한국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평면 공부를 위해 판화 장르에 도전했다. 판화용 물감을 직접 제작하기에 회화보다 물감에 대한 경험이 훨씬 많다. 그러다 물감 자체가 작품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Mass' 시리즈는 그 생각의 연장이다. 물감을 낚싯줄에서 떼어내 큰 덩어리로 뭉쳐 굳힌 것이다. 김영호 미술평론가는 "김태혁의 조형 실험은 이탈리아 작가 루초 폰타나 이후 정체돼 있던 캔버스 기반의 공간 확장에 새 물꼬를 트고 있다"고 평했다. (02)724-7832


조선일보 A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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